주석 보며 성경 읽기/10 사무엘 하

사무엘 하 11장 1절-5절, 주석과 해설 정리

Eloheinu 2022. 9. 28. 20:46

사무엘 하 11장 1절부터 5절에서는 다윗의 간음 사건에 대한 내용입니다. 부하들은 전쟁 중에 있는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한가로이 거닐다가 밧세바를 범하게 됩니다. 다윗의 씻을 수 없는 범죄에 대한 내용을 개역개정 성경으로 통독하고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석과 해설을 참고하여 본문을 이해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1장 1절-5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1장 1절-5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1장 1절-5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1장 1절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여기서 ‘해가 돌아와’란 말은 유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1월(아빕월) 곧 태양력으로 3, 4월이 다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Living Bible은 이를 ‘다음 해 봄이 되어’(in the spring of the following year)로 번역하고 있다. 한편 팔레스타인에서 겨울은 우기(雨期)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쟁의 시기가 아니나, 봄은 건기(乾期)에 해당하기 때문에 전쟁에 적합한 시기이다. 따라서 지난번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대는 승기(勝機)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계절 문제로 회군하였으나, 이제 다시 건기인 봄이 돌아와 제2차 출정이 가능해진 것이다(10:14 주석 참조). 이렇게 볼 때, 여기서 ‘왕들이 출전할 때’란 말은 곧 팔레스타인의 봄, 다시 말해서 전쟁하기에 적절한 시기라는 말임을 알 수 있다(Keil, Lange, Josephus,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부하

이에 해당하는 원어 ‘에베드’는 본래 ‘노예, 종’을 가리키는 말이다. 9:2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자신의 군주(君主)를 위해 마치 종과 같이 헌신하는 왕의 측근들, 또는 군사적인 관료들(2:12, 13, 10:1, 출 5:21, 7:10, 삼상 8:14, 15, 18:5, 22. 23)을 의미한다(Lang, Keil & Delitzch,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은 암몬의 랍바 성이 험란한 요새임을 알고 요압과 더불어 모략에 뛰어난 군사 관료들을 파견한 것이다(Keil).

 

온 이스라엘 군대

원문에는 군대라는 말이 없고 단지 ‘온 이스라엘’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이 말은 국가의 거사(擧事)를 위해 온 지파에서 소집한 이스라엘의 모든 병력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5:1, 8:15).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10:6-14의 랍바 전투에 이어 랍바 제2전투가 재개된 것을 가리킨다. 이 전세(戰勢)는 이스라엘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여, 이제 적의 수도인 랍바 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12:27-31).

 

랍바

‘큰 성’이란 뜻으로 암몬 족속의 수도이다(10:3 주석 참조). 얍복 강, 곧 현재의 와디 암만(Wady Amman)의 상류 계곡에 자리잡고자리 잡고 있는데, 요단 강에서부터 동쪽으로 약 37 km 정도 떨어진 지점이다. 한편 이 도시는 두 견고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첫째는 물들의 성이다(12:27). 즉, 이 성은 이 도시에 물을 공급해 주는 큰 수원지(水源池)를 지키던 성이다. 다음으로 둘째는 왕성(王城)이다(12:26). 이는 와디 암만의 북쪽에 있는 삼각형 모양의 고원 지대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매우 가파른 곳으로써 그야말로 난공 불락의 요새를 이루었다. 한편 이 같은 랍바(Rabbah)는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가 되어 있는데, 곧 현재의 암만(Amman)이다(Wycliffe).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온 이스라엘 군대가 랍바 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장면으로, 다윗이 범죄하게 된 배경을 제공해 준다. 즉 전시(戰時) 상황이라는 비상사태에도 불구하고 편안히 예루살렘 궁에 거하던 다윗은 영적 긴장이 풀려 결국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모살(謀殺)하는 엄청난 죄악에 빠지고 만다(2-27절).

 

 

사무엘 하 11장 2절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다윗이 낮잠을 자고 일어난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낮잠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한낮의 더위를 피하기 위한 관습이긴 하였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국가적으로 초긴장 상태에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태도였다. 즉 다윗은 낮잠을 잘 것이 아니라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마땅하였다. 따라서 당시 다윗은 영적으로 나태한 상태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이처럼 나태하고 게으른 자의 낮잠은 비극을 부르기 마련이다(4:5, 6). 한편, 여기서 ‘저녁때’는 늦은 오후를 의미한다(삼상 30:17). 랑게(Lange)는 대략 이때를 오후 3시경부터 해가 완전히 어두워진 때까지로 보았다.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잠에서 깬 다윗이 저녁쯤에 지붕 위를 산책한 것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는 다윗의 일상적인 습관이었을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 곳에서 보니

당시 다윗 궁은 높은 시온 산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인근 주민의 집 안마당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5:7 주석 참조.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혹자는 밧세바의 이러한 목욕 행위가 다윗 왕을 유혹하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의 주거 형태를 살펴볼 때 지나친 억측이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집 안마당의 우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그럴 경우 지붕 위에서 이웃집을 내려다보는 행위는 금기 사항이었기 때문이다(Keil, Patrick Philippson). 따라서 다윗 왕의 간음 사건(3, 4절)은 밧세바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한 다윗 자신의 범죄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사무엘 하 11장 3절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다윗이 …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다윗이 점점 더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있음을 역력히 증거해 주는 구절이다. 즉 처음에 시각적으로 미혹 받은 다윗(2절)은 자제력을 상실한 채 밧세바의 신분을 알아보았으며, 마침내는 정욕에 굴복하여 간음을 자행하고 만 것이다(4절). 이는 곧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는 말씀에 가장 부합되는 경우인 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살전 5:22) 려야 함을 절감케 해준다.

 

엘리암의 딸이요

같은 내용의 기록인 대상 3:5에서는 ‘암미엘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엘리암과 암미엘은 모두 ‘하나님’이란 뜻의 ‘엘’과 ‘백성’이란 뜻의 ‘암’이 합성된 칭호로서,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 즉 이는 모두 ‘하나님은 동족이심’이란 뜻으로 결국 같은 이름인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Wycliffe). 한편, 23:34절에서 엘리암은 아히도벨의 아들로 소개되었는데, 아히도벨은 한때 다윗의 모사로 중용(重用)되었다가 압살롬의 난 때에 다윗을 배반한 자의 이름과 똑같다(15:12, 16:20-23). 따라서 혹자는 이 둘을 동일 인물로 보고 밧세바의 조부(祖父)인 아히도벨이 본 장에 기록된 다윗의 악한 행동 때문에 훗날 압살롬의 난에서 다윗을 배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Lange). 만일 밧세바의 조부인 아히도벨과 다윗의 모사(謀士)인 아히도벨이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다면 이 같은 주장은 일리 있는 주장일 것이다.

 

헷 사람 우리아

그는 다윗의 삼십칠 인 용사들 중 하나였다(23:39). 그의 이름 우리아는 ‘여호와는 빛이시다’라는 뜻으로, 우리는 그의 이름 가운데서 그가 비록 이방인인 헷 족속이긴 하나 여호와의 종교로 개종한 신앙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헷 족속(Hittites)은 원래 가나안의 둘째 아들인 헷의 후손으로(창 10:15)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가나안 후기 원주민이다.

 

 

사무엘 하 11장 4절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이 … 데려오게 하고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한 가정과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행동으로서, 극형인 사형(死刑)에 해당하는 범죄였다(출 20:17, 레 20:10). 따라서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을 크게 범하는 죄였임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그의 속에서 일어나는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므로 결국 이렇게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되었다(약 1:15, 렘 5:8). 한편, 혹자들은 다윗 왕이 이러한 죄를 쉽게 저지를 수 있었던 하나의 원인으로 밧세바의 방조(幇助)를 지적한다(Keil, Pulpit Commentary, Lange). 즉, 본 절에는 다윗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 밧세바가 반항했다고 하는 아무런 언급도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중대한 책임은 다윗에게 있다 하더라도 한 남편의 아내(3절)로서 그녀의 태도 또한 결코 면책(免責)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Wycliffe, Keil).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히브리 원문에 따르면 밧세바가 자신의 부정함을 깨끗게 한 일은 다윗과 동침한 후에 행한 것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본 절의 정확한 번역은 ‘그가 그녀와 동침한 후 그녀는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다’이다(RSV, NIV, NASB, Jerusalem Bible). 한편 여기서 밧세바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다’는 말은 남녀가 서로 동침한 후에는 그 몸을 씻도록 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례를 그대로 지킨 것을 의미한다(레 15:18). 이로 보아 밧세바는 다윗과 간음하고서도 그에 대한 참된 회개는 하지 않고 의식적(儀式的) 정결에만 신경을 썼던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사무엘 하 11장 5절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여인이 임신하매

마침내 다윗이 뿌린 죄의 싹이 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이 범한 죄는 자생력(自生力)과 번식력이 강하여 반드시 그 열매를 맺고 만다. 따라서 범죄 한 인간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윗에게 말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야만 했다(레 20:10). 따라서 우리아는 이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자기 아내를 돌로 쳐서 죽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에 겁이 난 밧세바는 왕의 해결책을 기대하며 그에게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