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2장 1절-6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2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의 범죄에 대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의 내용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다윗의 범죄를 꾸짖습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묵상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2장 1절-6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2장 1절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신 때는 다윗이 범죄 한 이후(11:4, 5) 약 1년 정도는 되었을 때이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해산한 때였기 때문이다(14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윗이 범죄 한 후 즉시 견책하지 않으시고 약 1년 후에 견책하신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다윗으로 하여금 죄로 말미암는 영적인 고통을 경험케 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시 32:3, 4). (2) 다윗의 완악해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열리기를 기다리시기 위하여(시 32:5). 아무튼 이처럼 여호와께서 다윗을 회개시키기 위해 선지자 나단을 보내신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범죄 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 준다(겔 34:11, 12). 사실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여전히 죄와 절망의 자리에 버려진 상태에 있을 것이다(롬 1:28). 한편 나단은 앞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상의한 적이 있는 선지자이다(7:2). 특히 왕의 권세 앞에서도 당당히 진리의 말씀을 외치며 죄악을 지적하는 이 선지자의 용기는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힘과 소명감을 고취시켜 준다(행 4:13-22, 고전 4:1, 2).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이는 다윗의 무서운 범죄를 지적하기 위하여 나단 선지자가 사용한 비유이다. 나단이 이처럼 비유를 들어 다윗을 책망하고자 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한 나라의 왕인 다윗의 권세에 대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여 다윗의 완고해짐을 막기 위함이다. (2)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다윗 스스로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고백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3) 자신의 죄의 실상에 대해 둔감한 다윗에게 비유를 통해 그 죄의 참담한 실상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비유는 완악하고 어리석은 죄인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사 5:1, 겔 17:3, 19:2, 3, 24:3, 마 13:34).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적절한 비유까지 예비하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사무엘 하 12장 2절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여기서 ‘부한 사람’은 바로 다윗을 의미한다. 그리고 ‘양과 소’는 다윗의 수많은 처첩(妻妾)을 의미한다(3:2-5, 5:13-16, 대상 3:1-9). 나단이 이러한 비유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처럼 다윗이 많은 아내들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아니하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눈길을 돌렸다는 점(3, 4, 9절, 11:2-5, 27)이다 (Matthew Henry’s Commentary).
사무엘 하 12장 3절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가난한 사람은 …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여기서 ‘사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나’는 ‘한 개인의 사유 재산으로 획득한다’는 의미이다. 즉, 이 말에는 개인의 소유 개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창 4:1, 잠 4:7, 15:32, 16:16, 19:8, 룻 4:9, 10). 따라서 이 말은 작은 암양 새끼 하나가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한 가난한 사람의 절대 소유임을 강조해 준다. 한편, 혹자는 여기서의 ‘작은 암양 새끼’에 대하여 단순한 재산의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였다(Lange). 즉, 고대 근동 사람들은 가축을 그들의 부의 척도로 삼고 있었다는 지론(持論)이다(창 30:25-43, 민 32:1, 욥 1:3). 그러나 여기서 ‘작은 암양 새끼’는 단순한 재산 이상으로 주인의 온갖 사랑을 받고 재롱을 떠는 애완용 가축을 의미한다(Keil, Pulpit Commentary). 그 근거로서 우리는 근동 지방에서는 지금도 애완용 양을 키우는 관습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Keil).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1) 이 ‘작은 암양 새끼’는 다른 사람이 빼앗아갈 수 없는 오직 ‘가난한 사람’의 고유 소유였다는 점이다. (2) 또한 그것은 가난한 자가 극진히 사랑하고 길렀던 애완용 양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비유는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아내 밧세바(11:3)에 대한 우리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 딸처럼 되었거늘
이는 곧 가난한 자에게 있던 암양 새끼 한 마리가 그에게 있어선 단순한 애완용 동물의 차원을 넘어 그 자신의 유일한 꿈과 희망이 담겨 있는 고귀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자라며 … 먹으며 … 마시며 … 누우므로
암양 새끼와 가난한 주인 간의 동고동락 관계를 묘사한 말로서 곧 우리아와 밧세바 간의 애정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다윗이 우리아의 가정을 파괴하기 이전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못하였지만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무엘 하 12장 4절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행인 … 행인 … 자기에게 온 사람
혹자는 이와 같이 열거된 동의어(同義語)들이 인간의 탐심의 발전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Augustine, Wordsworth). 즉, 처음의 ‘행인’(히, 헬렉크)은 탐심의 초기 단계로서 잠깐 머물다 떠나는 단계이며, 둘째의 ‘행인’(히, 오레아흐)은 보다 진보된 단계로서 상당히 오래 머무는 단계이며, 셋째의 ‘자기에게 온 사람’(히, 이쉬 하바 엘라우)은 완전히 탐심이 그 사람 속에 자리 잡고 떠나지 않는 단계를 의미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일련의 동의어들은 어디까지나 같은 의미를 수사학적으로 다양하게 기술한 것일 뿐이다(Lange, Keil), 왜냐하면 본 절의 초점은 부자가 한 행인을 위해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은 강탈 죄를 부각하는 데 있는 것이지 인간의 탐심이 어떻게 발전하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행인’은 사막 지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행객을 가리킨다. 히브리 관습상 이들은 어느 집에 가든 하룻밤 지낼 자리와 식사를 요청할 수 있었는데 그 경우 집주인은 그들의 요구에 응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본 절에서 부자가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는 대신 오히려 가난한 자의 애지 중지하는 ‘암양 새끼’를 빼앗았다는 사실은 그의 소행이 마땅히 가중 처벌에 해당하는 악독한 범행임을 보여 준다.
사무엘 하 12장 5절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이 … 노하여
나단의 비유가 다윗의 잠자던 양심을 일깨우는 데 성공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렇지만 이는 분명히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에만 민감히 반응한 다윗의 모순된 태도가 아닐 수 없다(마 7:3, 4).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간음(11:4)과 살인(11:15)을 저지른 자신의 죄악에 대하여 스스로 율법에 따른 형벌(레 20:10, 24:17)을 선고한 셈이다.
사무엘 하 12장 6절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네 배는 도둑에 대하여 율법이 규정한 배상 기준이다(출 21:37, 22:1). 지금까지 율법을 무시하고 범행을 저지른 다윗이 율법의 기준을 언급한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모순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큰 죄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타인의 적은 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엄격한 타락한 인간성을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