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2장 15절-31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2장 15절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의 범죄의 결과로 밧세바가 낳은 첫째 아들이 죽게 되는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히 금식하며 엎드렸으나, 결국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어서 솔로몬이 태어나고 암몬 족속을 정복하게 됩니다.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2장 15절-31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2장 15절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14절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징계가 이제 임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런데 이는 보다 광의적(廣義的)으로 이해할 때 10-13절에서 예고된 다윗가의 재난이 이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사무엘 하 12장 16절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다윗이 …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여기서 ‘안에 들어가서’란 말은 다윗이 성소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조그마한 골방(마 6:6)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Lange, Keil,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처럼 다윗이 골방에서 7일 동안(18절) 금식 기도를 드린 것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14, 15절)를 하나님의 은총에 호소하여 살리기 위함이었다(22절). 특히 본 절에서 다윗이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있었다’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구할 자격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만을 기다린 애절한 형편을 잘 보여 준다.
사무엘 하 12장 17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그 집의 늙은 자들
이에 대해 혹자는 이들이 다윗의 숙부들과 나이 많은 형들이었다고 주장한다(Ewald). 그러나 이는 확실한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늙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켄’은 성경에서 ‘장로’(창 50:7, 삼상 4:3, 왕상 8:1, 3)로도 번역된 말로써 ‘가장 나이 많고 신뢰받는 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창 24:2).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다윗의 신하 중 다윗에게 가장 신뢰받는 원로급 인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Lange, Clerius, Keil).
사무엘 하 12장 18절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상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 라아’ 는 직역하면, ‘악을 행하다’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다윗 왕이 아이의 죽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Lange), 한걸음 더 나아가 그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어떤 행동을 하는 것까지도 의미한다(Keil, Hertberg).
사무엘 하 12장 19절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 하 12장 20절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 지라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 먹은지라
다윗의 신복들의 염려(17, 18절)와는 정반대로 다윗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동요도 없이 오히려 기운을 차리는 장면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윗 왕의 의외적인 행동은 학자들 간에 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한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1) 혹자는 다윗 왕이 애초부터 아이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기도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이 주장은 다윗 왕이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 본 장의 분명한 기록과 대치된다(16, 22절). (2) 또한 혹자는 다윗 왕이 그의 불행을 불굴의 의지로 딛고 일어선 것이라고 해석한다(Hertzberg, Schulz, Buddle). 그러나 이 해석은 다윗 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식음(食飮)을 전폐한 채 하나님께 매달린 사실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3) 다윗 왕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겸손하게 그대로 받아들인 신앙적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이다(Lange). 즉, 다윗은 지금까지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으나 이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죽은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주장이다. 이는 본 장의 기록과 일치할뿐더러(22, 23절) 이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죽은 아이 대신 솔로몬을 허락하신 사실과도 부합되므로(24, 25절) 타당한 견해라 할 수 있다.
사무엘 하 12장 21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사무엘 하 12장 22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여호와께서 … 살려 주실는지
다윗이 지금껏 금식 기도한 것(16, 17절)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좀 더 정확하게는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 가리라 하셨던 하나님의 뜻(14절)을 돌이키고자 하였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다윗은 자신의 죄 때문에 고통 중에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 아이(15절)를 보고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픔에 젖어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무엘 하 12장 23절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지금은 죽었으니
한번 떠난 인간의 생명은 돌이킬 수 없으며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죽은 아이에 대해 계속적으로 미련을 가지는 대신 하나님의 최종적 결정에 스스로를 복종시키므로 세상적 욕심을 버린 것이다. 이처럼 비록 범죄 하였지만 회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다윗의 자세는 매우 모범적이다. 즉 다윗은 인간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확신하므로 이제 자신의 아이의 죽음에 직면하여서도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욥 1:21, 시 36:9, 42:8).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 아니하리라
이는 자신의 아이가 이제 죽어 행복한 곳에 갔을 것이라고 하는 다윗의 확신이 아니다. 대신 이는 단지 아이가 죽은 자들의 거처인 스올에 들어갔으므로 이제 다윗 자신은 생전에 아이를 만날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을 피력한 말이다(Lange, Rust, Keil, Clericus). 즉,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곧장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세계인 스올로 내려간다고 믿었다.
사무엘 하 12장 24절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그의 아내 밧세바
본서 기자는 이제 밧세바를 더 이상 ‘우리아의 아내’(15절, 11:26)라 하지 아니하고 ‘다윗의 아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이제 하나님께서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인정하셨음과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위로하고
이 말은 단순히 정신적인 차원의 위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위로의 행위까지도 포함한다. 즉, 다윗 왕은 아이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그의 처 밧세바에게 새로운 아이를 낳아 주기 위한 실제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녀를 위로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이어지는 ‘동침하였더니’란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Hertzberg, Caspari).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기서 ‘솔로몬’(히, 쉘로모)은 ‘평강의 사람’이란 뜻이다. 다윗이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고 지은 동기에 대하여, 혹자는 이제 이 아이의 시대에는 다윗 자신의 시대에 있었던 것과 같은 피 흘리는 처절한 전쟁(8, 10장)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주장한다(Lange, Pulpit Commentary).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아이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다윗의 진실한 회개 이후에, 하나님께서 다윗과 밧세바 가정에 사랑의 표시로 주신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다윗이 그의 새 아이를 솔로몬이라고 이름한 것은 솔로몬의 출생이 하나님과 그 가정 사이에 ‘화목’ 관계가 회복된 사건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임이 분명하다(Keil).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신 것(25절)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그런데 이 같은 솔로몬은 실상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넷째 아들이다(5:14, 대상 3:5). 그러나 여기서 솔로몬이 앞서 죽은 아이(18절)의 바로 다음에 태어난 것처럼 기술된 까닭은 아마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특별히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5절). (2) 장차 다윗의 왕위를 이을 계승자로서 솔로몬을 부각하기 위함이다(왕상 1장). 한편, 본 장에서 솔로몬의 출생 기사는 랍바 성 함락 사건(26-31절) 보다 앞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은 솔로몬의 출생 사건이 랍바 성의 함락 사건 이후에 있었을 것으로 확실히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군의 랍바 성에 대한 포위 공격은 밧세바가 죽은 아이(18절)를 잉태하였을 때(11:5) 이미 진행되고 있었으며(11:1, 14-25) 솔로몬의 출생은 그로부터 약 2년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Keil, Lange, Clericus, Thenius). 따라서 우리는 본 기록 역시 연대별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앞의 내용과 연결시키기 위해 주제별로 기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5:11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2장 25절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선지자 나단을 보내
여기서 ‘보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솰라’는 ‘어떤 특수한 임무를 맡기어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다(민 13:16, 27, 14:36, 16:28, 29, 렘 19:14, 25:17, 시 105:26, 28, 사 55:11, 61:1). 따라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내방한 것은 다윗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알리기 위한 직무 수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Keil).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여기서 ‘여디디야’란 이름은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란 뜻이다. 이 이름은 ‘사랑을 입은 자’라는 뜻의 ‘다윗’과 내용상 같은 점을 시사해 주기에 충분하다. (1) 하나님께서 회개한 다윗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솔로몬을 선물로 주셨다는 사실이다(Keil, The Interpreter’s Bible). (2) 다윗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5절)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사 그의 아들 중에 하나를 후계자로 선택하여 다윗 왕조가 영구히 계속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7:14-16). 즉, ‘여디디야’라고 하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다윗의 후계자로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Pulpit Commentary, Payne). 아무튼 이와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으신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셨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7:4-16).
사무엘 하 12장 26절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요압이 …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랍바 성 함락 사건이 솔로몬의 출생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임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이다. 24절 주석 참조. 한편, 여기서 ‘왕성’(the royal city)은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두 성 중 하나의 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성은 카일(Keil)의 주장처럼 27절의 ‘물들의 성읍’(the city of water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 둘은 랍바 내의 각기 다른 두 성읍이다(Lange). 11:1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2장 27절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물들의 성읍
이는 왕성(王城)과 더불어 랍바 성을 이루고 있던 또 하나의 성이다. 즉 이는 얍복 강에서 흘러 들어온 물을 가두어 두었던 랍바의 수원지(水源池)를 지키기 위한 또 하나의 성이었다. 11:1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2장 28절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이제 왕은 … 점령하소서
랍바 성의 두 성 중 하나인 왕성(王城)을 탈취한 요압(26절)이 나머지 하나인 ‘물들의 성읍’을 탈취하기 전에(27절) 예루살렘에 있던 다윗 왕을 모셔오는 장면이다(Lange). 그런데 이처럼 요압이 직접 랍바 성을 완전히 함락시키지 않고 다윗을 초치(招致), 그로 하여금 랍바 성을 정복케 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견해를 달리한다. (1) 이러한 일은 그 당시 원정군(遠征軍)에게 흔히 있었던 일로서 이 일의 동기를 특별히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 암몬족의 재산을 사적으로 노략하지 않고 당시의 국제적 계약(契約)에 따라 합법적으로 인수하기 위해서라는 견해이다(Hertzberg). (3) 그러나 이상의 제 견해는 본 장의 전체 문맥과 조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요압의 처신은 다분히 개인적인 소신이나 야망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야 한다(Lange). 즉, 요압은 자기의 주인인 다윗 왕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에서 그렇게 했거나 아니면 군대 장관이라는 자신의 현 위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다윗 왕에게 아부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서에서 자주 보이는 다윗 왕에 대한 요압의 맹목적인 헌신과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이중적인 성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1:17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2장 29절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곳을 쳐서 점령하고
다윗이 … 랍바로 가서
당시 다윗이 거처하던 예루살렘(11:1)에서 암몬의 수도 랍바까지는 약 70 km 정도의 거리이다. 따라서 요압의 전갈을 받은 다윗(27, 28절)은 그리 많은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도 랍바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11:1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2장 30절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그 왕의 머리에서
여기서 ‘그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말캄’은 문법적으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이는 암몬족의 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Keil), 또한 암몬 사람들의 우상인 ‘말감’(밀곰)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Lange, Wevers, Wellhausen,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첫 번째 해석을 취할 경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1) ‘그 왕’에서 ‘그’를 암몬 사람들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로 보려면 그 앞절에 암몬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와야 하는데 없다는 점이다(Wellhausen). (2) 또한 본 절에 나오는 ‘보석 박힌 왕관’의 무게가 금 한 달란트에 달하는데 이는 사람이 오래 쓰고 앉아 있을 수 없는 무게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 절의 ‘그 왕’이란 당시 암몬인들이 자신들의 왕과 같은 존재로 섬기던 신(神)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 한 달란트라
여기서 달란트는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인들이 무게를 측정하던 도량형으로 1 달란트는 34.27 kg에 해당된다.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34 kg이나 나가는 면류관은 다윗이 머리에 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암몬족의 면류관에서 보석만을 빼어 자신의 면류관에 부착한 후 이를 머리에 썼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행위는 헛된 우상을 섬긴 암몬 사람들의 실패와 다윗 왕이 이제 암몬의 정복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행위였음이 분명하다.
사무엘 하 12장 31절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 도끼질과 벽돌 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톱질과 써레질 … 하게 하니라
본 절은 학자들 간에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왜냐하면 원문상 본 절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 다윗이 암몬인들에게 톱질이나 써레질 등과 같은 고역(苦役)을 시켰다는 해석이다(Hertzberg, Wycliffe). (2) 다윗이 톱이나 써레 등과 같은 도구로써 암몬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는 해석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 중 어느 해석이 보다 타당한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거 암몬인들이 다윗의 신복에게 크나큰 수치를 안겨 주었던 점(10:4, 5)에 비추어 볼 때 본 절은 다윗이 어떤 식으로든 암몬인들에게도 잔인하게 복수한 것을 가리키는 구절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