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3장 23절-39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3장 23절부터 39절까지의 말씀은, 자신의 친누이인 다말을 근친상간한 이복형제 암논에게 복수하는 압살롬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고 그술 왕 암미훌에게 도망하여 3년을 거했고, 다윗은 암논을 그리워합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며 큐티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3장 23절-39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3장 23절
만 이 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 털을 깎는 일이 있으매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을 청하고
만 이 년 후에
이 말은 압살롬의 복수극이 즉흥적인 감정에 의해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숙고와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한편, 압살롬의 이러한 음모는 단순히 자기 누이의 한을 풀어 주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쿠데타였을 것이다. 즉 다윗 왕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다윗의 차남인 길르압이 일찍 조사(早死)하였으므로 장남인 암논만 제거하면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3:3 주석 참조.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
바알하솔은 에브라임 성에서 북쪽으로 약 4 km,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24 km 떨어진 산지(山地) 마을이다. 이곳은 해발 1,200m가량 되는 고지로서 목양(牧羊)하기에 아주 적합한 목초지였다. 압살롬은 다른 왕자들처럼 이곳에 자기 토지를 마련하고 많은 양들을 사육했던 것 같다.
양 털을 깎는 일
당시 목축업을 주산업으로 삼고 있던 이스라엘에서 양 털을 깎는 일은 축제(祝祭) 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다(삼상 25:2-8). 따라서 압살롬은 이 일을 미끼로 자연스럽게 형제들을 불러들일 수 있었다.
사무엘 하 13장 24절
압살롬이 왕께 나아가 말하되 이제 종에게 양 털 깎는 일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왕은 신하들을 데리시고 당신의 종과 함께 가사이다 하니
청하건대 왕은 … 가사이다
압살롬은 먼저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들을 청한 후(23절) 이제 다윗 왕을 잔치에 청한다. 그러나 압살롬이 왕을 청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암논을 자기의 계략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펼쳤던 포석 작전(布石作戰)이었다. 즉, 그는 다윗이 신하들을 대동하여 자신의 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국정상(國政上) 어렵다는 것을 미리 계산하고, 그 대신에 왕의 실질적인 대표라고 간주되었던 암논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기 위해(26절) 계획적으로 다윗을 잔치에 청한 것이다(Hertzberg).
사무엘 하 13장 25절
왕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아니라 내 아들아 이제 우리가 다 갈 것 없다 네게 누를 끼칠까 하노라 하니라 압살롬이 그에게 간청하였으나 그가 가지 아니하고 그에게 복을 비는지라
복을 비는지라
혹자는 이에 대해 다윗 왕이 압살롬에게 풍성한 선물을 주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보아 이는 단지 압살롬이 마련한 축제가 성공적으로 마쳐지기를 기원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eil, Lange).
사무엘 하 13장 26절
압살롬이 이르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려거든 청하건대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하옵소서 왕이 그에게 이르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하되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
이는 압살롬의 요청에 불안감을 느낀 다윗이 완곡하게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는 말이다. 즉, 다윗은 암논에 대한 압살롬의 미운 감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암논을 보내 달라는 압살롬의 요청을 받고선 내심 불안해한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Lange).
사무엘 하 13장 27절
압살롬이 간청하매 왕이 암논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그에게 보내니라
압살롬이 간청하매 … 보내니라
이처럼 압살롬의 요청에 대해 다윗이 결국 승낙하게 된 까닭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이 서로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1) 다윗이 암논의 추행 사건 이후 2년 동안 압살롬으로부터 자기 누이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어떠한 조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Keil, Pulpit Commentary). (2) 암논은 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던 다윗 왕을 대신할 수 있는 맏아들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압살롬의 요구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주장이다(Lange). (3) 미리 모든 왕자들을 초청한 압살롬의 행위(23절)가 다윗의 의혹을 다소 희석시켰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Pulpit Commentary). 물론 이상의 모든 사실들이 다윗의 행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아마도 직감적으로 불안을 느꼈으면서도(26절) 압살롬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한 다윗 자신의 우유 부단한 성격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무엘 하 13장 28절
압살롬이 이미 그의 종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를 자세히 보다가 내가 너희에게 암논을 치라하거든 그를 죽이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 한지라
종
이에 해당하는 ‘나아르’는 대개 ‘나이 어린 심부름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17절에 언급된 ‘부리는 종’과 같은 ‘청년층의 하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암논을 쳐 죽이라는 명령을 수행할 정도라면(29절) 이미 어린아이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암논의 마음이 술로 즐거워할 때
70인 역(LXX)에 보면, 27절 끝에 “압살롬이 왕의 주연(酒宴)을 따라 주연을 베풀었다”라는 기록이 부가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이 해설적인 구절을 원문의 일부로 인정할 수 있다면(Thenius, Wellhausen), 압살롬은 암논을 일단 술에 취하게 만들기 위하여 왕에게나 대접하는 것과 같은 진수성찬을 준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에 따르면, 압살롬은 자신이 암논을 차기(次期) 왕위 계승자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암논에게 왕의 주연을 베풀었고, 그 결과 암논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술에 취하도록 계획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무엘 하 13장 29절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암논에게 행하매
암논의 죽음은 압살롬의 주도 면밀한 음모 하에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23-28절) 아울러 암논의 부주의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암논은 압살롬의 음모를 간파하지 못하고 술에 취함으로 스스로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술을 즐기는 미련한 자의 결과는 패망이라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잠 19:3, 20:1, 23:1-3). 한편 이처럼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한 행위는 비록 다말의 수욕에 대한 복수이기는 하나 이 역시 온당치 못했다. 왜냐하면 암논의 범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율법적인 차원에서 징계되어야 했는데도(신 32:35) 압살롬이 자신의 분노한 감정에 따라 암논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그 행동의 준거를 하나님의 말씀에 두지 않는 한 항상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즉 아무리 인간적인 측면에서 동정을 얻고 합리화시킬 수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배치된 행동은 또 다른 죄악을 낳는다.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히브리 사회에서 노새(mule)가 최초로 사용된 사건이다. 노새는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난 잡종이기 때문에 이종교배(異種交配)를 금지한 율법에 따라(레 19:19) 히브리인들은 노새를 사육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윗 왕 때에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노새가 귀족들의 운송용으로 수입되었다(18:9, 왕상 18:5). 기록에 따르면 압살롬과 다윗 왕, 그리고 솔로몬도 노새를 자주 타고 다녔음이 분명하다(18:9, 왕상 1:33, 10:25), 후에 노새는 전쟁용이나 짐을 나르는데도 널리 사용되었다(왕하 5:17, 대상 12:40).
사무엘 하 13장 30절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여기서 ‘소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무아’는 소문, 풍문(삼상 2:24, 왕상 2:28, 10:7, 왕하 19:7) 뿐 아니라 기별, 통보(4:4, 잠 15:30, 25:25, 렘 49:14, 옵 1:1)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소문’보다 ‘기별’ 또는 ‘통보’가 더 나은 듯하다. 왜냐하면 본 절에 기록된 상황은 매우 급박한 상황으로서 그 사실이 항간에 소문으로 퍼질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 사실과는 매우 다른 보고가 다윗 왕에게 전달된 것은 그 당시 현장에서 도망쳐 나온 자들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미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모든 왕자들이 죽임 당했으리라는 지레짐작하에 성급하게 보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Lange).
사무엘 하 13장 31절
왕이 곧 일어나서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눕고 그의 신하들도 다 옷을 찢고 모셔 선지라
옷을 찢고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처럼 옷을 찢는 행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나타내던 히브리인들의 관습이다. 19절 주석 참조.
신하들도 … 모셔 선지라
여기서 ‘모셔 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차브’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신하들이 자신들의 옷을 찢은 후 다윗 앞에서 부동자세(不動姿勢)로 서 있었음을 보여 준다.
사무엘 하 13장 32절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 아뢰어 이르되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요나답의 정확한 상황 판단이다. 이처럼 요나답이 사건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그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가까이서 살펴 왔음이 분명하다. 즉, 그는 자신이 묘략을 베풀어 주어 일어났던 암논의 다말에 대한 추행 사건(1-14절)이 그 오라비 압살롬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기에 지난 2년 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살펴보았을 것이다.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이를 직역하면, “압살롬의 입에(으로) 그 일이 결심되어 있었나이다”이다. 물론 여기서 ‘그 일’이란 암논을 살해할 음모를 의미한다(23-29절). 그런데 본 절을 좀 더 정확히 해석하려는 시도가 학자들 간에 있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1) 혹자는 본 절을 압살롬이 요나답에게 이미 자신이 결심한 사실을 입으로 발설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Keil). 그러나 우리는 압살롬이 생사를 다투는 중대한 일을 요나답에게 말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어렵다(Eerdmann). (2) 갈대아 역(Chaldean)은 본 절의 원문에 나오는 ‘입’을 ‘마음’으로 고쳐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본 절의 의미는 ‘압살롬의 마음에 그 일이 결심되어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원문에 치중하였다기보다는 해설에 치중한 오역(誤譯)이라고 보이기 때문에 지지할 수 없다. (3) ‘암논을 죽이려는 그의 결심이 굳게 닫힌 그의 입술에 잘 나타나 있었다’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Lange). 이 해석은 요나답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묘략가인데다 그동안 압살롬의 동정을 면밀히 추적해 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비교적 타당한 것이라고 보인다.
사무엘 하 13장 33절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하니라
상심하지 마옵소서
여기서 ‘상심하다’에 해당하는 ‘레브 숨’은 어떤 일에 마음의 부담을 가지고 계속해서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무엘 하 13장 34절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파수하는 청년이 눈을 들어 보니 보아라 뒷산 언덕길로 여러 사람이 오는도다
이에 압살롬은 도망하니라
이는 29절의 상황과 이어지는 구절이다. 즉, 본서 저자는 29절에서 압살롬의 암논 살해 사건을 이야기하다가 30-33절에서는 장면을 바꾸어 다윗 궁의 상황을 이야기하였으며 다시 본 절에서는 29절 사건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본서 기자는 본 장에서 ‘압살롬이 도망하니라’는 말을 반복 기술함으로써(37, 38절) 압살롬이 친족을 고살(故殺)한 큰 범죄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좁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압살롬의 도망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의 권세로 보아 그가 잡고자만 한다면 압살롬을 체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다윗이 그리 하지 않은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요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27절 주석 참조.
뒷산 언덕길
히브리인들은 동쪽 방향을 앞쪽이라고 불렀고 서쪽 방향을 뒤쪽이라 불렀다(출 3:1, 사 9:12). 따라서 이 말은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산길을 의미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사무엘 하 13장 35절
요나답이 왕께 아뢰되 보소서 왕자들이 오나이다 당신의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하고
종이 말한 대로 되었나이다
요나답의 간사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구절이다. 즉 그는 이미 압살롬이 다말의 일로 인해 암논을 살해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하였다. 32절 주석 참조. 그렇다면 그는 미리 이 같은 사실을 다윗에게 알려 사전에 비극을 막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이를 외면하고서는 요나답은 마치 다윗을 위로라도 하듯 자신의 추측(32절)이 맞은 것을 자랑하고 있다(Matthew Henery’s Commentary).
사무엘 하 13장 36절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소리를 높여 통곡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하니라
왕과 … 심히 통곡하니라
다윗이 이처럼 대성통곡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즉 31절에선 자신의 모든 아들들이 죽임당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나서 혼절(昏絶)하였지만, 이제 암논만이 죽을 것을 알고서도 대성 통곡한 까닭은 자신의 죄와 잘못이 기억났기 때문일 것이다. 즉 다윗은 압살롬이 다말 사건으로 인해 암논을 살해한 사실을 알고선 과거 자신이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우리아를 살해했던 죄를 기억했을 것이다(11장). 그리고 자신이 암논을 엄히 징계하지 못한 결과(21절) 결국 형제간의 살육이란 비극을 초래한 데 대하여 심한 자괴감을 느꼈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죽임 당한 암논에 대한 안타까움, 압살롬에 대한 염려 등이 어우러져 심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사무엘 하 13장 37절
압살롬은 도망하여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갔고 다윗은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
그술은 아람 소국들 중 하나로서 이스라엘 바로 북쪽에 인접해 있던 나라이다. 즉 ‘그술’이란 말의 뜻은 ‘다리의 땅’(bridge land)으로서 이는 헤르몬 산에서 갈릴리 호수까지 북부 요단 강 양편으로 다리처럼 길게 뻗어있는 지역을 가리킨다. 한편, 다윗은 당시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정략적인 결혼을 하여 그술과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마아가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압살롬이다. 따라서 그술 왕 달매는 압살롬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3:3 주석 참조.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니라
카일(Keil)은 본 절을 가리켜 다윗이 죽은 암논(28, 29절)을 생각하고 슬퍼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본 전에 대한 보다 상세한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 39절에서 다윗은 이미 죽은 암논을 잊어버린 지는 오래이고 다만 도주한 압살롬만을 생각한 것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 왕이 슬퍼했던 아들은 암논이 아니라 압살롬이었다.
사무엘 하 13장 38절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삼 년이라
다윗이 압살롬의 죄악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그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애끓기에 충분할 만큼의 세월이 지났음을 시사해 준다. 39절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3장 39절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
다윗 왕의 마음이 … 간절하니
본 절은 원문을 의역(意譯) 한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문은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가기를 그쳤더라’이다. 그런데 여기서 ‘ … 에게 간다’는 표현, ‘라체 아트 엘 … ’은 ‘ … 에게 가서 그를 벌하다’는 뜻을 가진다(신 28:7). 따라서 본 절을 보다 정확히 해석하자면 ‘다윗 왕이 마음속으로 압살롬을 법에 따라 처벌할 의지를 포기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자 점차 누그러지고 오히려 압살롬에 대한 연민의 정이 되살아 났음을 알 수 있다.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라는 하반절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보다 잘 입증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