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4장 21절-33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4장 21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은, 이복 형인 암논을 죽인 압살롬이 그술 지방으로 도망가 있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다윗 왕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른 포악한 행동으로 요압에게 강요합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큐티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4장 21절-33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4장 21절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본 절은 원문을 상당히 의역한 것이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는 ‘네가 이 일을 이미 이루었다’는 뜻이 된다. 즉 이 말은 다시 말해서, ‘나는 이미 너의 계획에 동의를 하였으니 이 일은 다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는 의미이다.
사무엘 하 14장 22절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이 말은 요압이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1-3절) 다윗에게 구한 내용을 이제 다윗이 허락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우리는 본 절에 의하여 요압이 압살롬의 사면을 위해 지금껏 왕께 간청해 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Lange, Keil). 왜냐하면 여기서 ‘종의 구함’이란 말은 요압이 드고아 여인을 통해 다윗에게 직접 드린 간구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만일 이 같은 추측이 사실이라면 다윗이 드고아 여인에게 던졌던 물음(19절)도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즉 이처럼 요압이 이전부터 압살롬의 사면을 간청해 왔기 때문에, 아마도 다윗 왕은 드고아 여인의 비유와 이야기(4-17절)를 다 듣고 나서는 그 배후에 요압의 술수가 작용한 것으로 쉽게 확신했을 것이다(Lange).
사무엘 하 14장 23절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그술
이스라엘 북쪽에 인접한 아람 소국(小國) 중 하나이다. 13:37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4장 24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이는 단지 다윗 왕이 압살롬을 자기의 궁전에 돌아오지 못하게 함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연금(軟禁) 조치를 취한 것을 의미한다. 즉 이로써 다윗 왕은 아직도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할 수 없다는 태도 표명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 다시 귀환한 압살롬을 용서하지 않은 까닭은 아마 압살롬에게서 자기 죄를 회개하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Lange). 한편 혹자는 이러한 다윗 왕의 조치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한다. 즉, 다윗 왕은 일단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상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어야 옳았다는 주장이다(Payne, Keil).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악독한 죄악을 묵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앞으로 백성들을 통치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따라서 다윗의 이번 조치는 비록 최선책은 아닐지라도 마땅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Lange, Patrick). 아무튼 이처럼 다윗과 압살롬 간에 형성된 불편한 관계는 결국 압살롬으로 하여금 부친에 대한 미움과 반역이라는 새로운 죄악을 저지르게 하였다(15장).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사실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 가문에 예고한 징벌이 어떤 식으로 성취되어 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12:10-12).
사무엘 하 14장 25절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25절-27절의 개요
갑작스럽게 문맥이 바뀌어 압살롬의 신상(身上)이 언급되고 있다. 추측컨대 이는 후에 있을 압살롬의 반역(15장)과 관련, 그를 부각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이 도리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음(18:9-15)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인 듯하다.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이는 압살롬의 외모의 출중함을 의미한다.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압살롬이 뛰어난 외모를 가졌다는 사실이 온 나라 안에 알려져 있었고, 그로 인해 압살롬이 백성들의 선망과 갈채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압살롬의 외모는 훗날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차기 왕위를 계승할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지목하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15:10-12).
흠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뭄’은 신체적인 결함(缺陷)을 의미하는 말이다(레 21:17-22, 22:20, 21, 24:19, 민 19:2, 신 15:21).
사무엘 하 14장 26절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이는 압살롬의 머리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말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서 머리털은 힘과 미(美)의 상징이었으며(Eerdmann), 그것이 빨리 자란다는 것은 힘의 왕성함(삿 16:17)을 의미하는 것이었다(Keil). 또한 숱이 많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지니는 것으로서, 자신의 신비로움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의 머리숱이 많고 빨리 자랐다는 사실은 백성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압살롬은 후에 그의 자랑거리인 머리털로 말미암아 죽었으니, 세상 자랑거리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다(18:9).
머리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율법에는 머리털을 깎되 민머리로 완전히 깎는 것은 엄히 금지되어 있다(레 19:27, 렘 9:26, 25:23, 49:32). 왜냐하면 고대 사회의 이방인들이 자기의 머리를 길게 기른 다음 민머리도 완전히 잘라 그것을 사당(祠堂)에 바치곤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율법의 규정에 따라 머리를 지나치게 기르지도 아니하였고(나실인은 제외) 민머리로 깎지도 않았으며 축제일에 적당히 깎곤 하였다. 그리고 그때 깎은 머리털은 무게를 달아 은(銀)으로 바꾸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곤 하였다(Wycliffe). 아마도 본 절에서 압살롬이 머리털을 깎아 무게를 달았다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관습에 기인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
여기서 왕의 저울로 계산한 세겔이란 곧 ‘왕실 세겔’을 의미한다. 즉 이스라엘 사회에서 무게를 측정하던 기본 단위는 세겔인데 이에는 ‘보통 세겔’과 ‘왕실 세겔’, ‘성소 세겔’이 있었다. 그중 왕실 세겔은 보통 세겔에 1/5을 더한 중량이었다. 한편 보통 세겔의 경우 한 세겔은 11.4g이므로 이백 세겔은 약 2.3 kg에 해당되는 무게이다. 보통 사람의 머리털이 1년 동안 자랄 수 있는 평균 무게인 약 500g과 비교해 볼 때 이는 엄청난 무게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혹자는 이 수치가 필사자의 착오에 의한 오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ange). 그러나 고대의 모든 역본들(Targum, the Syriac Peshitta, Vulgate, LXX)이 한결 같이 같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수치를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Keil).
사무엘 하 14장 27절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아들 셋 … 낳았는데
여기서 압살롬의 세 아들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은 까닭은 이들이 모두 조사(早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18:18의 압살롬이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어 한탄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에 의해 뒷받침된다.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압살롬이 딸의 이름을 다말이라고 지은 것은 암논에게 추행당한 자기의 불행한 누이동생 다말(13:1-14)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이는 아마도 압살롬의 딸이 그의 누이동생을 많이 닮았거나(Pulpit Commentary), 아니면 압살롬이 누이 동생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Keil). 한편, 70인 역(LXX)에는 “(다말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아내가 되어 그 아들 아비얌을 낳았다”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르호보암의 아내이자 아비얌의 어머니는 마아가라고 기록되어 있는 왕상 15:2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따라서 70인 역의 첨가 구절은 신빙성이 없다(Wycliffe, Keil, Lange).
사무엘 하 14장 28절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사무엘 하 14장 29절
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그술에서 삼 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고 왔으며(13:38) 또다시 예루살렘에서 2년 동안이나 연금 상태에 있게 되자(24절 주석 참조), 압살롬이 자기의 불행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압을 이용하는 장면이다. 그러나 요압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좋지 못한 감정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다(Lange).
사무엘 하 14장 30절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압살롬의 이와 같은 행위는 요압의 방관적인 태도(29절)에 대한 보복적 행위이자, 또한 요압을 억지로라도 자기에게 오게 하려는 계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압살롬의 고의적 행위는 자칫 엄청난 화재(火災)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아주 위험스러운 악행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압살롬은 지금까지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뉘우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자신의 불편한 처지만을 불평해 왔음을 알 수 있다(Payne).
사무엘 하 14장 31절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사무엘 하 14장 32절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본 절은 아버지 다윗 왕에 대한 압살롬의 오만불손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즉, 압살롬은 자기가 이스라엘 땅에서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부자지간의 정을 끊어버리고라도 그술에가서 사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하는 불효 막심한 말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의 자숙하는 기미를 전혀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아버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에게 도피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은 바로 그의 외할아버지의 나라인 그술로서, 이 나라는 일찍이 다윗 왕이 정략결혼을 통하여 화친을 맺은 나라이다(3:3, 13:37, 38). 따라서 다윗 왕은 압살롬의 반란의 가능성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은 셈이라 할 수 있다. 즉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일반적 자연법칙인 바,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씨를 뿌린 결과 이제 그 악의 열매를 하나하나 거두고 있는 것이다(갈 6:7).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 옳으니라
전체 문맥으로 볼 때, 압살롬의 이 말은 다윗의 면전에서 자기 죄의 유무를 따져 법에 따라 처벌받겠다고 하는 겸손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Pulpit Commentary, Keil). 오히려 이는 오만불손하게도 자신의 살인 행위(13:28, 29)가 정당한 행위인 양 자신의 무죄를 정당히 표현한 것이다(Payne,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즉, 압살롬은 암논의 추행(13:4)에 자기라도 나서서 암논을 죽인 것은 정당한 행위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의 죄는 일체 부정하고 오히려 아버지 다윗에게 죄가 있는 양, 모든 상황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해하려 드는 극단적인 사고(思考)의 한 예이다.
사무엘 하 14장 33절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매
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는 행위는 신하가 왕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취해야 하는 예절이다(4절 주석 참조). 그러나 여기서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그가 다윗 왕을 진심으로 존경했다는 표시가 결코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요압(3:27, 20:9, 10)이나 가룟 유다(마 26:48)의 경우와 같은 가식적인 예절만을 갖추었을 뿐, 마음속에는 오히려 다윗 왕에 대한 반발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15장).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여기서 입을 맞추는 행위는 화해의 표시로서, 특히 아버지가 범죄 한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은 그를 완전히 용서한다는 표시이다(창 33:4, 45:15, 눅 15:20). 이로 보아 우리는 이제 다윗 왕이 압살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러나 다윗 왕의 이러한 조치는 지금껏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조금도 회개하지 않는 압살롬을 단지 자식에 대한 부정(父情) 때문에 용납한 어리석은 행위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이로 말미암아 압살롬이 차기 왕이 될 것이라는 인상을 백성에게 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반역적 활동(15:1-12)을 사실상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Payne). 결국 다윗 왕은 여기서 압살롬의 반란을 허용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인간적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되며, 항상 공명 정대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