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5장 1절-12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5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돌아온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기 위하여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압살롬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속이면서 자신의 반역의 입지를 다져가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고하여 본문을 큐티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5장 1절-12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5장 1절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
그 후에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아레이 켄’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모두 3회 등장하는데(3:28, 대하 32:23), 이는 유사한 접속사 ‘아하레이 켄’과 구별된다. 즉, ‘아하레이 켄’은 (1) 시간의 전후 관계를 이어 주는 시간적 접속사, (2) 서로 다른 두 내용을 이어주는 단순 접속사(2:1, 10:1, 13:1, 15:1, 대상 18:1, 19:1, 대하 20:1)로 사용된 반면, ‘메아레이 켄’은 오직 시간의 전후 관계를 이어 주는 시간적 접속사로만 사용되었다. 따라서 본 장에 나오는 사건은 시간적으로 14:33의 사건 이후에 일어난 후속 사건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병거와 말들 … 호위병 오십 명
압살롬이 병거와 말들과 오십 명의 호위병들을 갖춘 것은 반역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병기를 구비한 행위일 뿐 아니라, 아도니야의 경우처럼 차기 왕으로서의 위용을 백성들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왕상 1:5). 즉 이러한 병력의 배치는 흔히 이방의 왕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의 강한 권세와 화려한 영화를 나타내기 위해 곧잘 이러한 수행원들을 거느렸던 것이다(삼상 8:11). 따라서 압살롬의 이러한 행위는 (1) 이방 왕들의 사치한 풍습을 따른 것이었고, (2)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자처한 반역적 행위였으며, (3)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모으려는 계략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The Interperter’s Bible, Keil, Lange). 한편, 여기서 ‘호위병’은 히브리어로 ‘이쉬 라침’인데, 이는 ‘달려가는 사람, 경주자’란 뜻이다. 즉 ‘호위병’은 당시 왕의 마차 앞에서 뛰어다니며 마차가 지나갈 길을 정비하고 왕을 경호하던 경호부대를 가리킨다(Jamieson).
사무엘 하 15장 2절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여기서 성문이란 왕궁의 문을 의미한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Pulpit Commentary). 구약 시대 당시 히브리 사회에서 마을의 성문은 장로들이 앉아서 재판하는 장소였다(창 23:10, 18, 욥 29:7, 잠 24:7, 31:23, 신 21:19, 22:15). 때문에 이러한 관례에 따라 이스라엘 왕은 자기의 성문, 곧 궁궐 문에 합법적인 재판관(裁判官)을 세워 재판을 베푸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재판관은 먼저 예루살렘 주민들을 재판하고 다음에 타 성읍의 소송 문제들을 재판하였는데, 그 재판 시간은 이른 아침이었다(de Vaux). 따라서 압살롬은 성문에서 열리는 왕의 재판을 전적으로 방해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성문 길 곁에 섰던 것이다.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압살롬이 왕의 재판을 받으러 올라가는 사람들을 세워놓고 개인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장면이다. 백성들에 대한 압살롬의 이러한 친절은 자기를 왕으로 보이기 위해 거창하게 병력을 배치한 오만 불손한 행위와는 아주 대조적이다(1절). 그렇지만 이 역시 그가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취한 행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는 음흉한 행동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6절).
사무엘 하 15장 3절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재판도 하기 이전에 사법적인 결정을 내려주고 있는 압살롬의 독단적 발언이다. 즉, 압살롬은 상대방에게 무조건 유리하게 말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살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장차 다윗 왕에 대하여 불평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압살롬이 다윗을, 백성들에 대한 자기의 기본 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무책임하고 불의한 자로 매도하고 있는 구절이다. 한편 여기서 ‘송사를 들을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쇼페트’는 사법적 처리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재판관, 또는 사법 관리를 의미한다. 이는 왕이 직접 임명한 자였기 때문에 왕적 권위로 재판할 수 있었고, 이 사람이 한 번 결정하면 더 이상 상소할 수 없었다(de Vaux). 그런데 당시 다윗이 이러한 사람을 세운 것은 아마도 혼자서 모든 소송을 검토하고 재판하기에는 너무 벅찼으며, 또한 재판에는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따라서 다윗이 이러한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고 하는 압살롬의 거짓 증거는 다윗이 사법적 의무에 대해 방임하고 있는 양 매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Matthew Henry).
사무엘 하 15장 4절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내가 … 재판관이 되고
이처럼 압살롬이 왕자란 신분을 이용, 스스로 백성의 재판관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재판관 조직이 아직 체계화되지 못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이스라엘에서 그 같은 조직이 전문화된 형태를 갖춘 것은 유다 왕 여호사밧 때의 일이다(대하 19:4-1).
내게로 오는 자에게
여기서 ‘내개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리’는 ‘내 위에’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본 절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하여서는 학자들마다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피력하고 있다. (1) ‘내 위로 나오는’이란 표현이 당시 재판 현장의 상황을 나타내 주는 말이란 견해이다. 즉, 당시 재판장은 자리에 앉아서 재판하였으며 백성들은 재판장 곁에 서서 재판을 받았다(출 18:13). 따라서 압살롬은 이러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은연중 백성들에게 재판을 베풀어 주겠다는 자기의 의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Keil). (2) ‘내 위로 나온다’는 표현은 백성들이 자기들의 짐을 그에게 맡기는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Lange). 따라서 압살롬은 여기서 백성들이 곤란한 문제를 자기에게 가져올 경우 자기가 맡아서 처리해 줄 것이라는 언질을 했다는 것이다. 이 두 견해 중 어느 것이 보다 정확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양 견해 모두 압살롬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것을 나타내 주므로 그 어느 쪽을 택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사무엘 하 15장 5절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입을 맞추니
본래 입을 맞추는 것은 반가움의 표시이며 진정한 화해의 표시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여기서 백성들에게 자기를 선전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이를 이용하였다. 14:33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5장 6절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여기서 ‘훔치다’에 해당하는 원어 ‘가납’은 특히 ‘남을 속여서 훔치는 것’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압살롬은 백성에게 관심을 보이고(2절), 현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며(3절), 약자를 동정하고(4절), 그들에게 애정을 보였다(5절). 그런데도 본서 저자가 이 모든 압살롬의 행위를 가리켜 ‘사람의 마음을 훔쳤다’고 언급한 까닭은, 압살롬이 백성들에게 성실한 통치를 베풀어 신망(信望) 받는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기만하는 술책으로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은 압살롬과 같이 불의한 방법으로 기존 권세자에 대하여 항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롬 13:1, 2, 벧전 2:13, 14). 그러나 오늘날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억압되며 생존권이 침해당한다면, 신자는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시 58:1).
사무엘 하 15장 7절
사 년 만에 압살롬이 왕께 아뢰되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하건대 내가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
사 년 만에
어떤 사본에는 ‘40 년 만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왜냐하면 다윗 왕의 전체 통치 기간도 40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5:4, 5). 따라서 40년이란 기록은 필사자의 착오에 의한 오기(誤記)임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대부분의 역본의 기록대로 4 년을 따라야 한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Vulgate 등). 한편, 혹자들은 본 절을 ‘40 일 만에’로 보기도 한다(Ussher, Patrick). 그러나 40일은 압살롬이 반란의 준비를 갖추기에 너무나 짧은 기간이므로 이 역시 지지할 수 없다.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압살롬이 하나님께 어떠한 서원(誓願)을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압살롬의 패역한 행동과 전후 문맥 관계로 보아, 이는 다윗을 속이고서 헤브론으로 가려 한 압살롬의 거짓말이었음이 거의 확실시 된다. 즉 그는 다윗으로부터 아무런 의혹도 사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거사(擧事)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이제 하나님까지 팔아먹고 있다(9-12절).
헤브론에 가서 … 이루게 하소서
본래 이름이 기럇아르바인 헤브론은 예루살렘 남쪽 약 30여 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여호와 신앙의 발상지이다(창 13:18). 따라서 당시 예루살렘이나 기브온(대상 16:39)과 같은 종교 중심지가 있긴 하였지만, 압살롬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헤브론으로 가겠다고 한 것(8절)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Matthew Henry).
사무엘 하 15장 8절
당신의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서원하기를 만일 여호와께서 반드시 나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리이다 하였나이다
종이 아람 그술에 있을 때에
암논 살해 사건 후 압살롬이 외조부인 그술 왕 달매에게로 도망쳐 그곳에서 3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던 때를 가리킨다(13:37, 38). ‘서원하기를 … 여호와를 섬기리이다’는 압살롬의 말은 그가 헤브론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이다(7절). 그런데 압살롬이 이 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까닭은 그가 헤브론에서 반역의 기치(旗幟)를 들기 위함이었다. 즉 압살롬은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며(3:1, 3), 다윗이 그곳에서 기름 부음 받은 것(2:1-4)을 생각하고 자기도 그곳에서 기름 부음을 받으려 작정한 것이다(Leon Wood). 뿐만 아니라 압살롬은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에서 예루살렘(5:1-10)으로 옮긴 탓에 생긴 헤브론 주민들의 섭섭한 감정도 충분히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Thenius, Wycliffe,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이 헤브론을 수도로 삼은 동안 그곳 거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상당한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지고 난 후에는 자연히 그 같은 이권을 상실하였을 터이니, 헤브론 주민들은 점차 다윗에 대하여 불만과 섭섭한 감정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최적지로서 헤브론을 지목하고서, 어떻게든 반역의 무리를 규합하려 했던 것이다(10-12).
사무엘 하 15장 9절
왕이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하니 그가 일어나 헤브론으로 가니라
평안히 가라
다윗 왕의 이러한 허락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란의 움직임에 대하여 다윗 왕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이는 아마 온유한 성품을 지닌 다윗 왕이 압살롬을 단지 사랑스런 한 아들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인 예루살렘(6:12-19, 신 12:4-14)을 놔두고 굳이 헤브론에까지 가서 제사를 드리겠다고 한 압살롬의 요구에 대해 아무런 의혹도 갖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사무엘 하 15장 10절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정탐을 … 두루 보내
압살롬이 이처럼 반란 전에 정탐을 이스라엘 각지에 보낸 것은 아마 각 지파의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고(Kiel), 자신이 거사(擧事)할 때 반발하지 않도록 미리 정지(整地) 작업을 해놓기 위해서였을 것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나팔 소리를 듣거든
여기서 나팔 소리는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기(叛旗)를 든다는 신호이다. 그런데 당시 압살롬이 나팔 소리 하나만으로 전국에 거사를 알린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혹자의 주장처럼 압살롬이 순전히 나팔 소리로만 거사를 알렸다고 볼 수 없으며(Pulpit Commentary), 나팔 이외에도 다양한 신호 방법을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Lange).
사무엘 하 15장 11절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이백 명이 … 내려갔으니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데리고 간 이백 명은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예루살렘 성의 고위 관리들이었을 것이다. 즉, 압살롬은 이들이 자기의 거사에 동조(同調) 해 줄 경우 자기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질 것을 계산하고 이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린다는 명목(7, 8절)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Lange). 그렇다면 이백 명의 인사들은 압살롬의 반란 기도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압살롬에게 유인당한 셈이므로, 아마 압살롬은 이들이 반항할 경우 이들을 살해하려고까지 했을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사무엘 하 15장 12절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하도벨
길로는 유다 남쪽 산지에 있는 한 성이다(수 15:51). 이곳은 헤브론에서 북서쪽으로 약 4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늘날의 ‘길벳 잘라’(Khirbet Jala)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 출신 아히도벨은 지략이 뛰어나 다윗의 모사(謀士)로 중용(重用)되었던 자로서(31절), 이스라엘 가운데 그의 지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그를 영입하였는데, 과연 그의 기대대로 아히도벨은 기발한 모략을 제공하여 압살롬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16:20-23, 17:1-3). 그런데 한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로 활약했던 아히도벨이 이처럼 쉽게 다윗 왕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모사가 된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항을 놓고 추정해 볼 때, 그 까닭은 아마도 다윗 왕의 악행에 대한 그의 반발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11:3과 23:34 또는 대상 3:5 등을 통해서 볼 때 밧세바는 아히도벨의 손녀인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아히도벨이, 자기의 손녀를 추행하고 또한 손녀사위인 우리아를 모살(謀殺)한 다윗 왕의 파렴치한 행위(11장)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다가 압살롬의 제의가 있자 바로 그의 편에 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1:3 주석 참조.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처럼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은 이제 급속도로 압살롬에게 크게 유리해진 반면, 다윗 왕에게는 크게 불리해졌다. 그 원인은 아마도 압살롬의 매력적인 외모(14:25, 26)와 그의 간교한 여론 조성(1-6절) 이외에도 백성들에게 비추어진 다음과 같은 다윗 왕의 부정적인 모습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1) 밧세바 간음 사건과 우리아의 죽음(11장), (2) 암논의 범죄에 대한 그의 우유부단한 조치(13:21), (3) 영토 확장 사업(8장)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화된 다윗 왕의 대국민 관심과 과다한 세금 징수 등으로 인해 상당수의 백성들은 이제 다윗 왕의 공정성과 윤리성, 그리고 통치력에 의혹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Lange, Leon 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