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6장 1절 - 14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6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압살롬을 피해 도망을 가던 다윗이 중간에 거짓을 말하는 므비보셋의 종인 시바를 만납니다. 또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를 만나게 되는데, 시므이는 다윗을 따라가며 모욕하였습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큐티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6장 1절 - 14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6장 1절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여기서 ‘마루턱’(top of hill)이란 감람 산 마루턱 곧 감람 산 꼭대기를 의미한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
본래 사울의 종이었으나 다윗의 명에 의하여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을 섬기게 된 자이다 (9:2, 9-11). 그는 성품이 간사하고 교활하였는데, 그의 그 같은 성품은 본 장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여름 과일
여름이 끝나갈 무렵 완전히 익은 열매를 가리킨다(암 8:1, 2). 이 과일은 열매 야자수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70인 역(LXX)에서는 ‘대추야자’(헬, 포 이닉스)로 번역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열대 지방이나 중동 지방의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행 시에 종종 이것으로 갈증을 해소한다고 한다(Keil, Pulpit Commentary).
사무엘 하 16장 2절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시바가 이르되 …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시바가 현재 압살롬의 반란(15:10-12)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다윗 왕에게 이처럼 음식물을 가져온 것은, 아마 압살롬의 반란이 결국 실패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다윗 왕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이같이 많은 음식물을 날라 온 것으로 추정된다(The Interpreter’s Bible).
사무엘 하 16장 3절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그가 말하기를 …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시바의 이 말은 거짓이었다(19:26, 27).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지금까지 왕위 찬탈을 위한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은 데다, 그는 절뚝발이로서 이미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는 결격사유(缺格事由)를 지닌 자였기 때문이다(4:4 주석 참조). 따라서 시바가 마치 므비보셋에게 왕위 찬탈에 대한 야욕이 있는 것처럼 꾸며댄 것은 물욕(物慾) 때문이었음이 분명하다. 즉 시바는 피난 중에 경황이 없는 다윗을 흥분시켜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자신이 차지하려는 사악한 목적 하에서 이 같은 모함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4절).
사무엘 하 16장 4절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이는 시바의 악한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다윗 왕의 경솔한 결정이다. 그런데 평소 지혜로운 다윗 왕이 이처럼 경솔한 결정을 내리게 된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다윗은 현재 압살롬에게 쫓기는 입장(15:14)이므로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2) 시바가 가져온 음식(1, 2절)이 다윗을 감동시켜 공정성을 잃게 하였기 때문이다. (3) 다윗에게 다소나마 사울가의 부상(浮上)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이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Keil). 아무튼 다윗이 미처 사실 여부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이처럼 실언(失言)을 한 것은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되는데, 실상 아무리 조심하여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곧 언행(言行)의 신중성이다.
사무엘 하 16장 5절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바후림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감람 산을 넘어 요단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6 km 지점이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 과거 다윗이 옛 아내인 미갈을 당시의 남편 발디엘로부터 취하여 왔을 때 발디엘이 울며 따라오다가 되돌아간 역사적인 성읍이기도 하다(3:16).
게라의 아들 … 시므이
사울의 친족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시므이는 자기 지파와 가문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유다 지파인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 됨을 시기하고, 이제 다윗이 쫓기는 신세가 되자 다윗을 저주하였던 것이다. 물론 시므이는 훗날 압살롬의 반란이 수습되자 다윗 왕을 찾아와 이와 같은 과거의 망령된 행실을 시인하고 다윗의 용서를 받긴 하였다(19:16-23). 하지만 그는 결국 솔로몬 왕 때에 왕명을 어겨 참수를 당하고 말았다(왕상 2:36-46). 우리는 여기서 극단적인 지파주의자 또는 혈통주의자(血統主義者)의 편협한 사상과 그의 비참한 말로를 볼 수 있다. 즉 오늘날 가문, 혈통, 지연(地緣) 등 소아(小我)에 사로잡혀 대아(大我)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표상으로 이 시므이를 들 수 있다.
사무엘 하 16장 6절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여기서 돌을 던진 행위는 상대방에 대하여 참을 수 없는 극도의 분노를 표시한 행위이다(Wycliffe). 그런데 시므이가 이처럼 다윗과 그 신복들을 저주하며 돌을 던진 까닭은 다윗이 사울가의 피를 흘렸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8절). 물론 여기서 ‘사울가의 피’란 사울 왕의 비참한 죽음이 아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과 사울의 군장 아브넬의 죽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울 왕의 죽음은 블레셋과의 전투인 길보아 전투에서 생긴 죽음으로(삼상 31장) 다윗 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았으나,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은 어느 정도 다윗 왕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3:27, 4:6). 즉, 시므이는 여기서 다윗 왕이 과거 이스보셋과 아브넬을 죽인 장본인이며 따라서 베냐민 지파의 쇠퇴와 사울가의 몰락의 책임이 바로 다윗에게 있다고 믿으면서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Hertzberg). 그러나 이러한 시므이의 비방은 전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살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예우하며 아껴주었을 뿐이다(9:9, 10). 따라서 시므이의 이 같은 행위는 그릇된 자기 선입견(先入見)의 결과였다.
사무엘 하 16장 7절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악한 자여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쉬 하벨리야알’을 직역하면 ‘벨리알의 사람아’란 뜻이다. 여기서 벨리알이란 말은 무익한 것, 무가치한 것, 또는 파괴, 파멸이란 뜻을 갖는다. 따라서 이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아’, 또는 ‘파괴를 일삼는 자식아’란 뜻이다(Wycliffe). 이렇게 볼 때 시므이의 욕설은 보통 사람이면 도저히 참기 어려운 독설(毒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일 신약 시대에 이르러 벨리알이란 말은 사탄을 지칭하는 말로 발전되었다(고후 6:15).
가거라 가거라
이는 약속의 땅에서 떠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는 욕설이다. 이와 같은 욕은 약속의 땅 가나안(창 13:14-17)을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믿고 있었던 히브리인들에게는 아주 악랄한 저주였다.
사무엘 하 16장 8절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압살롬의 난(15:10-12)이 이스보셋과 이브넬을 죽인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시므이는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 다윗을 정죄하고 있지만, 실상 그의 정죄는 공정하지 못하며, 지극히 감정적이고 무지에 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의 책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삼상 15:28).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압살롬의 난 역시 다윗의 사적(私的)인 범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벌이었기 때문이다(12:10, 11).
사무엘 하 16장 9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아비새
요압의 동생으로(2:18), 다윗 왕의 조카이자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이다(3:30, 10:10).
죽은 개
가장 보기 싫고 하찮은 인간을 뜻하는 히브리적 은어(隱語)이다(3:8, 9:8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6장 10절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스루야의 아들들아
스루야는 아비새의 어머니이다(2:18). 그런데 여기서 ‘아들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아비새 곁에는 그의 형 요압도 함께 있었던 것 같다. 요압은 아마도 시므이를 단칼에 목 베어 버리자는 아비새의 의견(9절)을 지지했을 것이다.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아비새의 제안(9절)을 일축해 버리는 말로써, ‘나의 생각과 너희의 생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함축된 의미를 가진다(왕상 17:18, 수 22:24).
여화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시므이의 악독한 저주를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는 다윗의 모습이다. 즉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은 물론 시므이의 저주까지 포함하여,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모든 사건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과거에 지은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2:10-12) 임을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 다윗은 자기를 괴롭히는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보복하거나 불평하기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고 철저히 근신(謹愼)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사무엘 하 16장 11절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내 몸에서 난 아들도 … 이 베냐민 사람이랴
이는 시므이의 저주 역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다윗의 역설(力說)이다. 즉 자신의 아들 압살롬도 자신에게 반기(反旗)를 들었는데(15:10-12), 하물며 다른 지파 출신인 시므이가 자신에게 저주 한 마디 한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사무엘 하 16장 12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나의 원통함 … 그 저주 때문에 … 갚아주시리라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고 있는 본 구절에는 ‘원통함’과 ‘저주’라는 용어가 서로 대조되고 있다. 이 중 ‘원통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인’은 죄, 사악한 행동을 의미하는 말로써 여기서는 과거 다윗이 실제로 범했던 죄(11장)를 의미한다. 반면, ‘저주’는 시므이가 다윗에게 행한 저주를 의미하는 바, 곧 다윗이 사울가의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울가의 피를 흘린 자라는 저주(7, 8절)를 받은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윗은 자기가 이러한 수욕(受辱)을 묵묵히 감수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가해진 과다한 저주를 기억하셔서 자기를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현재 자기의 억울한 형편을 정확히 살펴보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일정한 징계의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위기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무엘 하 16장 13절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그를 향하여 … 먼지를 날리더라
여기서 ‘먼지를 날리다’는 말은 ‘먼지를 일으키다’는 뜻이다(공동번역). 즉 시므이는 다윗 앞서 행하면서 다윗을 모독하는 의미로 짐짓 그 앞길에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 흙먼지는 다윗은 물론 시므이 그 자신의 머리 위에도 떨어졌을 것이다. 이와 관련 시므이는 자기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 역시 먼지와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했다. 즉 그것은 시므이가 다윗에게 퍼부은 저주가 합당치 아니한 것일 때 그 저주는 도리어 시므이 자신에게로 되돌아갈 뿐이란 사실이다(12절).
사무엘 하 16장 14절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피곤하여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예핌’은 ‘피곤하다’는 뜻의 동사 ‘아이프’의 형용사형으로, ‘피곤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다(KJV). 그런데 혹자는 ‘아예핌’이 여기서는 지명(地名)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근거로 본 절에서 ‘샴’이라고 하는 지시 부사가 사용되었음을 든다. 즉 이 ‘샴’이란 용어는 ‘거기에서’란 뜻으로, 다윗과 그 일행이 휴식을 취한 한 장소를 지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Keil, Lange, Pulpit Commentary, The Interpreter’s Bible). 이 중 어느 견해가 보다 타당한지는 판단키 어렵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을 취하여도 문맥에 큰 변화는 없다. 다만 ‘아예핌’을 고유 명사로 볼 경우, 17:18, 21에 의거할 때 ‘아예핌’은 바후림을 지나 요단 강 근처에 위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