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7장 1절-14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7장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의 요청을 받고 압살롬의 진영에 투항한 척했던 후새가 아히도벨의 계략을 반박하는 장면입니다. 이 과정 중에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후새의 계략이 더 적절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고하여 큐티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7장 1절-14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7장 1절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여기서 ‘오늘 밤’은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급히 도망가고(15:14-16)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바로 그날(15:37, 16:15) 밤을 가리킨다(Keil & Delitzsch Commentary). 따라서 아히도벨의 이와 같은 모략(謀略)은 다윗에게 약간의 쉴 여유도 주지 않고 바로 뒤따라가 다윗을 처치하자는 계략이었다. 사실 이러한 아히도벨의 상황 판단은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은 피곤한 몸으로 바후림(또는 아예핌) 부근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곳은 예루살렘에서 밤 사이에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는 요단 강 근처였기 때문이다. 16:14 주석 참조. 그러므로 만일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정예군을 급파하였더라면 다윗은 꼼짝 못 하고 칼에 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Wycliffe).
사무엘 하 17장 2절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힘이 빠졌을 때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르페 야딤’은 직역하면 ‘손들이 무력해질 때’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손들’이란 말은 성경의 용례들을 살펴볼 때 대개 ‘힘’을 상징하는 말이다(레 12:8, 14:21, 32, 민 6:21, 신 3:24, 16:10, 시 89:48, 겔 8:1).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이와 같은 아히도벨의 예견(豫見) 또한 아주 정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을 따르고 있는 무리들은 소수의 시위병들과 육백 명의 용사들(15:18)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무장하지 아니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거나 선량한 백성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15:17 주석 참조. 따라서 압살롬의 정예부대가 엄습(掩襲)할 경우 아히도벨의 예견대로 이들은 모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흩어질 것이 분명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아히도벨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게 된다.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다윗 왕만을 쳐 죽이겠다는 아히도벨의 이 같은 모략은 치밀한 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아히도벨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대다수가 압살롬을 지지하고 있으며(15:12), 현실적으로 실제적인 왕위 계승권자였기 때문에(대상 3:1-9) 무의미한 살인을 감행할 필요가 없다고 계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단지 다윗 왕만 처치하면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압살롬 아래로 몰려들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히도벨의 치밀한 계산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이사도벨의 무서울 정도로 치밀한 지략(智略)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침해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자극하는 것이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이 제거하려 한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이다(삼상 16:1-13).
사무엘 하 17장 3절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 하리이다 하니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여기서 ‘모든 백성’이란 온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당시 다윗 왕을 추종하던 세력들을 의미한다. 16:15 주석 참조. 따라서 본 절로 보아 아히도벨은 다윗이 사망한 이후에는 다윗 왕을 추종하던 자들일 지라도 이미 사망한 왕을 더 이상 따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아히도벨은 ‘돌아오게 하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곧 그가 다윗의 추종자들을 국가의 반란자들로 그리고 압살롬의 정권(政權)을 정통성 있는 정권으로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즉 아히도벨은 이 같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압살롬에게 은연중 아부하고 있었던 것이다(Keil, Lange). 한편, 70인 역(LXX)에서는 본 절 다음에 ‘마치 신부가 자기 남편에게로 돌아옴과 같이 … ’란 구절을 첨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말은 압살롬을 신랑에다, 국가 또는 백성들을 신부에다 비유한 것으로 곧 압살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히도벨의 아첨이라고 볼 수 있다(Ewald, Thenius, Payne). 그러나 이 구절이 원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정말로 아히도벨이 이러한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Keil, Lange).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이는 다윗 추종자들이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느냐 오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다윗의 생사(生死) 여부에 달린 문제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다윗이 죽기만 하면 백성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압살롬에게로 오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Pulpit Commentary, Keil).
누가복음 17장 4절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옳게 여기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솨르’는 ‘좋아하다, 기뻐하다, 바르게 여기다’는 뜻(삿 14:3,7 민 23:27, 삼상 18:26, 시 119:128)인데, 이 단어의 형용사형 ‘요쉐르’는 ‘마땅히 행해야 하는’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욥 33:23, 잠 14:2). 따라서 본 절이 의미하는 바는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 모두가 아히도벨의 말을 기뻐하면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죄로 인해 부패해진 인간들의 이성적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절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의 친아버지 다윗을 죽이자는 제안에 스스럼없이 ‘옳게 여긴’ 압살롬이나, 지금껏 섬겨오던 자신들의 왕 다윗을 쳐 죽이자는 제안에 동조한 이스라엘 장로들이나 모두 다 건전한 이성(理性)을 지녔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7장 5절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압살롬이 후새를 불러 그의 견해를 경청코자 한 사실로 보아 이제 후새는 아히도벨 못지않게 압살롬으로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Lange).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은 다윗을 구원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14절).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듯이 보이는 압살롬의 이 작은 조치 하나로 말미암아 이제 이스라엘의 역사가 뒤바뀌어지기 때문이다(17:14-26).
누가복음 17장 6절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누가복음 17장 7절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이는 아히도벨의 계략이 지금까지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잘못된 것이라는 후새의 주장이다. 즉 후새는 다윗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15-26절) 아히도벨의 계략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8절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 격분하였고
이와 같은 후새의 주장은 다윗이 지금 기진맥진해 있다고 한 아히도벨의 주장(2절)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즉 후새는 아히도벨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다윗과 그 추종자들은 용사(勇士)들이며 지금은 예루살렘 성을 빼앗긴 일로 인하여 격분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즉시 군사적인 행동을 개시하자고 주장한(1절) 아히도벨의 모략을 분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위급한 상황을 최대한 호도(糊塗)하여 다윗을 위기에서 구하려는 후새의 절실한 노력을 볼 수 있다. 한편, 후새가 본 절에서 다윗과 그 추종자들을 ‘새끼를 빼앗긴 곰’에다 비유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여기서 곰은 팔레스타인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시리아의 갈색곰을 가리키는데(Wycliffe), 이것은 매우 사나운 것으로 이름나 있다(잠 17:12, 호 13:8). 즉 후새는 다윗과 그 종자들을 사나운 시리아의 갈색곰에다 비유함으로써 지금 심히 약화된 다윗의 실제 전력(戰力)을 압살롬이 직시하지 못하도록 꾀하였던 것이다(16:14).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이러한 후새의 주장 또한 기습 공격 시 쉽게 승리롤 이끌어낼 것이라고 한 아히도벨의 낙관적인 주장(2절)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즉, 후새는 아히도벨이 아무리 기습 공격을 한다 하더라도 다윗은 병법(兵法)에 뛰어난 사람이므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그리 용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과거 다윗이 사울 왕으로부터 도피할 때 실제로 많은 추격 부대를 여러 차례 따돌린 바 있고(삼상 24:1-22, 26:1-15), 또한 그가 뛰어난 지략가라는 사실은 이미 압살롬과 그 신하들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후새의 주장은 그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사무엘 하 17장 9절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정예 부대를 파견할 경우(1-4절) 압살롬과 다윗 진영은 사실상 최초의 전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후새는 이 최초의 전투에서 기습 공격에 능한 다윗 군에게 압살롬의 군대가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무엘 하 17장 10절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최초의 전투에서의 패배가 몰고 올 압살롬 군대의 심각한 사기저하(士氣低下)를 예상하는 후새의 말이다. 즉 ‘사자’는 성경에서 대개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스러운 자를 상징하는 바, 여기서는 압살롬의 용맹스러운 군사를 의미한다(1:23, 창 49:9, 사 38:13, 벧전 5:8). 그리고 ‘낙심하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메스 이마스’는 ‘완전히 녹아버리다’ 또는 ‘완전히 낙담하다’는 뜻이다(시 22:14, 112:10, 사 34:3 겔 21:7, 나 2:10). 따라서 본 절을 해석하면 아무리 용맹스러운 압살롬의 군사라도 그 마음이 완전히 낙담해 버릴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같은 후새의 논리는 매우 그럴듯하다. 왜냐하면 군사전략상 최초의 전투는 전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에 있을 전투는 압살롬 진영과 다윗 진영의 실세(實勢)를 판단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이같이 중요한 최초의 전투에서 압살롬의 군대가 그 일부라도 다윗 군의 기습 작전에 말려들어 패하게 된다면, 그 소문이 온 군대에 퍼져 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될 것은 당연했다. 특히 압살롬의 군대는 반란 동조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난이 실패할 경우 국가의 법에 따라 처벌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후새는 바로 이와 같은 논리로써, 만약 실패할 경우 너무나도 큰 손실을 보게 될 이번의 성급한 출전을 포기하도록 압살롬을 회유(懷柔)하고 있다.
사무엘 하 17장 11절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온 이스라엘을 …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아히도벨의 모략(1-3절)을 대신하는 후새의 대안(代案)이다. 여기서 후새는 이스라엘의 국민병(國民兵)을 온 지파에서 모집할 것을 제안한다(Matthew Henry).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이 국민병을 모집하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다윗 왕으로 하여금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모면케 하기 위한 교묘한 방책이었다(15-26절). 그런데 이 같은 후새의 제안은 자기들이 갖고 있던 모든 힘을 한 번 과시해 볼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라는 점에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끌었다(Clericus). 또한 여기서 후새는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총병력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진두지휘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실상 압살롬을 전장(戰場)에 끌어들이기 위한 계략이다. 즉 반란의 주모자인 압살롬이 전장에 나가서 죽거나 포로가 된다면 반란은 끝이 나기 때문에 후새는 압살롬 자신이 친히 전장에 나가도록 부추겼던 것이다(18절). 그런데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의 영웅 의식을 자극하였다. 즉, 거대한 군대를 친히 지휘한다는 것은 새로운 통치자 압살롬에게 있어 매력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후새의 제안은 압살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던 것(14절)이다(Payne). 우리는 여기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교묘히 움직여, 당시 상황에서 최선책이었던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는 후새의 뛰어난 활동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실 후새의 이러한 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이다(14절).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다윗의 죄에 대하여서는 징계할지라도, 그의 생명과 나라는 끝까지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 바(7:14-16, 12:9-13) 이제 그에 따라 다윗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신 것이다.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단은 팔레스틴 최북단에 위치한 성읍으로 일명 ‘라이스’, ‘레센’으로도 불린다(수 19:47). 그리고 브엘세바는 팔레스타인 최남단에 위치한 성읍으로, 과거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사가 된 곳이다(삼상 8:2). 따라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말은 이스라엘 전 국토를 의미하는데(24:2, 15, 삼상 3 :20), 본 절 역시 그러한 의미이다. 삿 18:29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7장 12절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 위에 덮여
여기서 ‘덮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누아흐’는 ‘앉다’라는 뜻으로 이슬이 내려앉는 것 외에도 황충(蝗蟲)의 떼가 농작물을 갉아먹는 모습(출 10:14), 혹은 파리 떼나 꿀벌 떼가 먹이를 공격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사 7:19). 따라서 본 절은 엄청난 다수로써 소수를 몰아붙이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Wycliffe). 그런데 후새가 제안한 이러한 전술은 많은 시간을 요하는 전술로서, 일찍이 제시됐던 소수의 민첩한 정예 부대를 파견하여 순식간에 다윗을 살해하자는 아히도벨의 모략(1, 2절)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다.
사무엘 하 17장 13절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 그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다윗이 다행히도 성 안으로 도피할 경우 밧줄로 그 성과 시설물들을 묶어 모조리 강으로 끌어내리자는 뜻이다. 물론 이는 과장된 표현이다. 즉 여기서 후새는 이스라엘 대중의 힘을 과장하여 표현함으로써, 인해전술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자신의 제안(11, 12절)을 더욱 그럴듯하게 보이려 한 것이다(Keil and Delitzsch Commentary).
사무엘 하 17장 14절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압살롬과 온 이스리엘 사람들이 …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압살롬과 그의 추종자들이 당시로서는 최고의 전략이었던 아히도벨의 계략(1-3절)을 거부하고, 그보다 못한 전략이었던 후새의 계략을 받아들이는 장면이다. 이는 압살롬 진영의 치명적인 실책(失策)이었다. 여기서 이러한 압살롬의 치명적인 실책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두어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압살롬이 앞으로의 정세를 지나치게 낙관하였기 때문이다. 즉, 압살롬은 앞으로도 다윗의 세력은 미미할 것이나 자기의 세력은 국민병의 모집으로 인해(11절) 크게 획장될 것이라고 낙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의 낙관과는 달리 다윗에게는 뜻하지 않은 군사적 원조가 들어왔으나(27-29절) 압살롬은 거국적인 국민병 모집에 실패한 듯하다(Keil, Lange). (2) 압살롬이 후새의 아첨에 우쭐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이스라엘 총병력의 지휘자가 되라는 후새의 아첨(11절)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직관력(直觀力)을 상실하고 말았다(Payne).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압살롬의 통치능력(統治能力)의 부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은 다윗의 자세와는 현저히 비교된다(5:19, 23).
여호와께서 … 명령하셨음이더라
아히도벨의 계략이 파기되는 대신 후새의 모략이 채택되는 것과 같은 결정적인 사태의 변화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략과 술수가 팽배하던 압살롬의 군사 회의에 마치 친히 참석하셨던 것과도 같이 역사하사 악인들의 불의한 모략을 결국 파하신다. 이런 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하심이 의인에게는 평안과 복을 뜻하지만 악인에게는 파멸과 심판을 의미할 뿐임을 확인할 수 있다(요 1:14, 1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