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보며 성경 읽기/10 사무엘 하

사무엘 하 18장 1절-18절, 주석과 해설 정리

Eloheinu 2022. 10. 13. 22:34

사무엘 하 18장 1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압살롬의 반역이 결국 실패로 끝이 나고 압살롬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다윗의 간곡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을 죽입니다.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 준비를 위해 참고할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8장 1절-18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8장 1절-18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8장 1절-18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8장 1절

 

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백성을 찾아가서

여기서 다윗이 ‘백성을 찾아갔다’고 하는 말은 단순히 찾아갔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그가 군대의 조직을 정비하고 사열했음을 의미한다. 즉 다윗 왕은 자기를 따르던 기존의 용사들과 새로운 지원병들을 재편성하여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전시(戰時)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Wycliffe Bible Commentary). 한편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이와 관련, 당시 다윗 군대의 병력이 그렛 군대와 블렛 군대 및 가드에서 온 육백 용사, 기타 추가 병력을 합하여(15:18) 약 4천 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Dake’s Annotated Reference Bible, Matthew Henry’s Commentary).

 

천부장과 백부장을 … 세우고

여기서 ‘천부장’과 ‘백부장’이란 각기 자기 수하에 천 명과 백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지휘관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편제(編制)는 신약 시대 당시 로마 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행 10:1, 21:31, 32, 23:10-17). 한편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러한 편제는 모세에 의해 최초로 수립되었는 바 평상시에는 행정 체제로 운용되다가 비상시에는 군사 체제로 전환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출 18:24-26 주석 참조). 아무튼 본 절에서 다윗이 백부장과 천부장 같은 소단위 지휘관을 세우는 등 지휘 계통을 확립한 것은 전군(全軍)의 힘을 결집시키고 효과적인 작전 수행을 가능케 한 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무엘 하 18장 2절

 

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요압의 휘하에 … 아비새의 휘하에 … 잇대의 휘하에

다윗이 자신의 전(全)군대를 삼분(三分)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이 군대를 셋으로 나누는 전술은 소수로써 적의 많은 군대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근세(近世)까지 많이 사용되었던 전술이다(삿 7:16, 9:43, 삼상 11:11). 한편. 다윗이 이방인 출신의 잇대를 요압과 아비새와 동등하게 삼분의 일의 군장(軍長)으로 삼은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다(15:19 주석 참조). 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예루살렘에서 급히 도망할 당시 보여주었던 잇대의 충성심을 다윗이 인정하였다는 증거이다(15:21).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원문에는 다윗의 참전(參戰) 의지가 더욱 확실히 표현되어 있다. 즉, 인칭 대명사 ‘나’는 원어로 ‘아니’로 나와 있는데, 이는 강조의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또한 ‘나가리라’는 말, ‘야차’ 앞에도 절대 부정사 ‘야초’가 덧붙여져 있는데 이는 다윗 자신이 반드시 전쟁에 나가리라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금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먼저 군사들 앞에서 솔선수범하려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추측컨대 다윗은 지금의 이 전쟁이 자기의 잘못 때문에 일어났으므로(12:7-14, 13:21, 14:28-33) 속죄하는 마음에서도 이 같은 자세를 보였을 것이다.

 

 

사무엘 하 18장 3절

 

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왕은 나가지 마소서

백성들의 만류는 왕에 대한 그들의 깊은 사랑을 보여준다. 즉, 백성들은 진심으로 다윗 왕을 사랑하였다. 혹시라도 다윗이 전사할 경우 자신들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게 될 것임을 염려한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이와 같이 솔선수범하는 왕과, 왕을 아끼는 백성들의 아름다운 모습 속에서 이미 전쟁의 승리를 예감(豫感)할 수 있다. 한편 이와 관련, 요압과 같은 약삭빠른 사람은 보다 실제적인 계산 하에서 왕의 출전을 만류했을 것이라는 추측 또한 전혀 배제할 수 없다(Hertzberg, Payne). 즉. 요압은 다윗이 전쟁에 참여할 경우 혈육의 정 때문에 반란의 주모자인 압살롬의 생명을 해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계산하에 다윗의 출전을 만류했을 수도 있다.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여기서 ‘성읍’은 다윗이 현재 압살롬을 피해 거주하고 있는 마하나임의 성을 가리킨다(17절 주석 참조). 한편 이처럼 백성들은 다윗 왕이 마하나임 성에 있는 것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즉 다윗 왕이 무엇보다도 안전할 수 있다는 점, 다윗 왕이 성에 남아서 후방(後方)을 튼튼하게 지킬 수 있다는 점 등이다. 사실 숫자에서 압살롬의 군대에 비해 열등한 다윗 군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또한 성에는 귀중한 보급품이 저장되어 있어(17:27-29), 유사시 이를 적절하게 공급해 줄 지도자도 필요했다(Lange). 아마도 바로 이러한 이유를 들어 백성들은 당시 다윗의 출전을 만류했을 것이다.

 

 

사무엘 하 18장 4절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왕이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여기서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라는 말은 본래 ‘너희 눈에 좋은 대로’란 뜻이다. 아무튼 본 절은 백성들의 사리(事理)에 맞는 말을 겸허히 수용할 줄 아는 다윗의 고매한 인품을 잘 드러내준다.

 

 

사무엘 하 18장 5절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여기서 ‘너그러이 대우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트’는 ‘부드럽게 감싸다’는 뜻이다(욥 15:11). 따라서 이 같은 다윗의 말에서 우리는 다윗이 이미 자기의 군대가 승리하리라는 확신(15:16, 25)과 압살롬을 용서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Hertzberg, Payne). 이와 같은 다윗의 강열한 부성에(父性愛)는 아버지의 생명만을 노렸던 압살롬(17:1-4)의 경우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한편, 본 절에서 다윗은 압살롬을 ‘젊은’이라고 칭함으로써 아직도 압살롬을 정치적 반란자이기보다는 자신의 철없는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Wycliffe). 즉 여기서 ‘젊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는 미성숙한 아이를 의미하는 말이다(창 14:24, 21:12, 17, 삼상 1:22, 24, 2:11, 왕상 3:7, 대상 22:5, 호 11:1).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혹자는 본 절을 가리켜 다윗 왕이 지휘 체계에 따라 자신의 명령을 말단 군사들에게까지 시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Pulpit Commentry).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주장을 지지할수 없다. 왜냐하면 본 절은 백성들이 지휘 체계를 통해 다윗의 명령을 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전 군대를 사열할 때(1절) 군장들에게 특별히 명령하는 것을 백성들이 들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우리는 12절에 나오는 한 사람의 말을 들 수 있다. 즉 그는 거기서 자신이 왕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만 군장들에게 명령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무엘 하 18장 6절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에브라임 수풀

여기에서 에브라임 수풀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 간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수풀’하면 우선 요단 서편의 에브라임 경내(境內)에 있는 무성한 숲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수 17:15, 16). 그러나 본문에는 다윗 군이 요단 강을 건너 다시 서편 땅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이 없다. 대신 본문과 관련된 기록들은 다윗 군과 압살롬 군 간의 전쟁이 요단저편(동편), 곧 마하나임 근처(17:24, 26, 27)에서 벌어졌음을 다음과 같이 보여 준다. 즉 아히마아스가 승전 소식을 마하나임에 있는 다윗 왕에게 알리기 위해 요단 계곡의 길을 달려갔다고 함은 본 전쟁이 마하나임에서 가까운 요단 동편에서 있었음을 증거 한다(19-23절). 또한 다윗 군이 압살롬의 군대를 격파하고 마하나임으로 회군(回軍)한 사실(19:3)도 이 전쟁이 요단 동편의 수풀에서 있었음을 보여준다(Thenius). 다시 말해서, 만약이 전쟁이 요단 서편의 수풀에서 있었더라면 다윗 군은 아마 마하나임으로 회군하기보다는 곧장 예루살렘까지도 정복했으리라는 주장이다(Ewald). 그러나 다윗 군이 그렇게 아니했음은 전쟁의 무대가 요단 동편이었음을 증거 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하여, 본 장에서 전쟁의 무대가 되고 있는 ‘에브라임 수풀’은 비록 그 명칭상 혼동이 되기는 하지만 요단 이편(서편)의 수풀이 아닌 요단 저편(동편)의 수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무엘 하 18장 7절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란 압살롬 휘하의 군사들을 가리킨다(17:26). 그리고 ‘다윗의 부하들’이란 다윗이 세운 군장들과 천부장과 백부장 및 그 휘하의 군사들을 의미한다 (1, 2절). 그런데 이처럼 본서 저자가 다윗 군에 의해 압살롬의 대군이 패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다윗 군대의 우수한 조직력(組織力)과 그 지휘관들의 탁월한 지휘력(指揮力)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즉 이는 다윗 군대가 숫자면에서의 열세를 조직력과 지휘력의 월등한 우세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무엘 하 18장 8절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사면으로 퍼져

여기서 ‘퍼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추츠’는 ‘흩어지다, 정신없이 도망치다’는 뜻이다(민 10:35, 왕상 22:17, 대하 18:16, 사 21:1, 렘 23:2). 즉 본 절은 압살롬의 군사들이 다윗 군에 대항하기 위해 사방으로 배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군의 훌륭한 조직력과 효율적인 공격에 의해 혼비백산(魂飛魄散)하며 흩어지는 모양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Keil).

 

수풀에서 죽은 자가 … 많았더라

요단 동편의 에브라임 수풀에는 좁은 협곡이나 가파른 벼랑, 또는 늪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다윗 군의 효율적인 공격에 뿔뿔이 흩어졌던 압살롬의 군사들은 이러한 곳에 떨어지거나 빠져 그곳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사무엘 하 18장 9절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다윗의 부하들’은 원문에도 복수형(複數型)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압살롬은 다윗의 여러 부하들과 마주쳐 신분이 발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압살롬은 그 순간 자기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황급히 도망쳤을 것이다.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노새는 구약 시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대개 왕족이나 귀족들이 이용하던 운송 수단이었다. 13:29 주석 참조.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히브리어 원문에는 압살롬의 ‘머리’(히, 로쉬)가 상수리 나무에 걸렸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 절만으로는 압살롬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의 굵은 가지 사이에 끼었는지, 아니면 숱이 많은 그의 머리털이 가지에 걸렸는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압살롬의 머리털이 걸린 것이라고 주장하였다(Wycliffe Bible Commentary). 한편, 압살롬의 머리털은 숱이 많고 빨리 자라기로 소문나 있었다(14:26). 그러나 여기서 압살롬은 자기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두 가지로 말미암아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즉, 노새는 왕의 신분을 나타내던 것이며 그의 무거운 머리털은 백성들의 큰 호감을 사던 것이었으나, 이제 그는 이 두 가지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Lange). 우리는 여기서 악인의 자랑거리를 도리어 수치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섭리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사무엘 하 18장 10절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다윗 군의 한 군사가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린 것을 요압에게 보고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가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보고한 까닭은, 그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는 다윗 왕의 명령(5절)을 들은 탓이었다.

 

 

사무엘 하 18장 11절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은 열 개와 띠 하나

이는 전공(戰功)을 세운 군사들에게 주는 포상물(褒賞物)이다. 한편 여기서 ‘은 열 개’는 화폐라기보다는 군복에 다는 일종의 장식품 또는 소지품(눅 15:8)이란 의미가 더 강하다(Lange). 또한 ‘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고라’ 역시 허리에 두르는 군장(軍裝)으로서, 화려한 수가 놓인 일종의 장식품이기도 하다(왕상 2:5, 사 3:24, 22:21). 따라서 요압이 제시한 포상물은 군인의 명예를 세워주는 훈장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무엘 하 18장 12절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는 명예스러운 훈장 보다는 다윗 왕의 명령(5절)에 순종하겠다는 굳센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병사의 말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 하셨나이다

왕명을 귀히 여기고 있는 병사가 온갖 명예와 특권들(11절)을 거부함은 물론, 요압의 잘못된 생각까지 바꾸려고 애쓰고 있는 장면이다. 이는 지난날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불의한 명령에도 기꺼이 순종하였던 요압의 행동과는 극히 대조적이다(11:14-17).

 

 

사무엘 하 18장 13절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내가 만일 … 해하였더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만일 자신이 압살롬을 죽일 경우 훗날 다윗 왕 앞에서 받을 혹독한 질책을 다윗의 병사가 우려하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이 압살롬을 죽일 경우, 요압이 도리어 자기를 압살롬을 살해한 자로 다윗 왕에게 고소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이로 보아 이 병사는 평소 요압의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신임하지 아니한 듯하다.

 

 

사무엘 하 18장 14절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이처럼 요압이 지체하지 않고 압살롬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마 압살롬에 대한 다윗 왕의 공식적인 사면령(赦免令)이 내려지기 전에 그를 처치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즉 요압은 압살롬을 살려 둘 경우 그가 또 다른 국가적 재앙을 야기시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기에 그 화근(禍根)을 미리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서둘러 압살롬을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일전에 압살롬의 귀환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추진했던 요압(14:1-24)이 이제는 도리어 그를 살해하려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사실에서도, 우리는 시류(時流)에 편승하기에 급급한 요압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충분히 볼 수 있다.

 

작은 창 셋을 가지고

여기서 ‘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베트’는 날카로운 창이나 화살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지팡이’ 혹은 ‘길쭉한 막대기’를 의미한다(대상 11:23, 욥 9:34, 시 23:4, 잠 26:3, 29:15 사 9:4). 즉 요압은 끝이 뾰족한 막대기를 들고서 압살롬을 죽이러 간 것이다. 요압이 그와 같은 것을 세 개씩이나 갖고 갔던 까닭도 그것이 날카로운 창이나 화살이 아닌 막대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요압이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 후에도 열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인 사실(15절)은 더욱더 요압이 뾰족한 막대기를 사용했음을 입증해 준다(Keil, Lang). 즉, 요압이 막대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압살롬이 즉시 죽지 아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요압이 날카로운 무기를 가져가지 않고 막대기를 가져간 까닭은 아마 그의 마음이 너무도 조급하여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갔기 때문일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보아 이 용어를 ‘창’, 또는 ‘쇠꼬챙이’로 번역한 70인 역(LXX)이나 불가타 역(Vulgate)은 재고(再考) 해 볼 여지가 있다.

 

 

사무엘 하 18장 15절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무기를 든 청년

직속상관 밑에 예속되어 있어 항상 그를 보좌하며 상관의 무기를 대신 들고 다니면서 관리하는 병졸을 가리킨다. 대개 이 같은 직책은 신분이 확실하며 총명하고 남다른 충성심과 용맹을 지닌 자에게 맡겨지는 것이 관례였다(삿 9:54, 삼상 31:4).

 

압살롬을 … 쳐 죽이니라

이처럼 요압과 그의 부하들이 압살롬을 살해한 행위는 다윗의 명령(5절)을 거역한 처사이자 다윗 왕가에 대한 일종의 멸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파괴자요 인격의 파탄자인 압살롬을 요압의 손을 빌어서라도 결국 공의의 심판에 처하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전(全) 역사를 주장하사 모든 존재들을 공의의 법대로 이끌어 가신다. 따라서 우리가 견지해야 할 최선책은 항상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된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왕상 2:4, 렘 4:1, 2, 엡 5:9). 한편, 압살롬이 과거 자신의 종들을 시켜 암논을 살해하였던 것(13:28, 29)과 유사하게 요압의 신복들의 손에 의해 죽임 당하였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충격과 또 다른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마 26:52).

 

 

사무엘 하 18장 16절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요압이 나팔을 불어 … 그치게 하니

압살롬의 죽음(14, 15절)은 반란(15:10-12)에 대한 완전한 평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요압은 자신의 군사는 물론 압살롬의 군사들도 더 이상 희생당하지 않도록 나팔을 불어 종전(終戰)을 선포한 것이다(Keil, Kurtz).

 

 

사무엘 하 18장 17절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큰 구멍

여기서 말하는 구멍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렁이나 아니면 폐쇄된 우물 따위를 의미하는 듯하다(Wycliffe).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에는 물이 귀하므로 곳곳에 우물을 파 둔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창 26:17-22).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요압이 이처럼 압살롬의 시체 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것은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패륜아는 돌로 쳐서 죽이라는 율법의 조항을 준수한 것이었다(신 21:21). 또한 이 돌무더기는 아간과 아이 왕의 경우처럼 반역자의 수치를 나타내는 표시이기도 하였다(수 7:26, 8:29). 따라서 이는 곧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만한 자의 최후는 이처럼 비참한 결말과 수치뿐임을 교훈해 주는 산 증표라 하겠다(겔 32:26-28, 마 27:3-8).

 

 

사무엘 하 18장 18절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라

본래 압살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모두 조사(早死)했다(14:27 주석 참조).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이름을 이을 소망이 없게 되자, 변칙적인 방법으로 비석을 세워 자기의 이름을 후대에 전하려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명예에 대한 압살롬의 과도한 욕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에서 세워진 그의 비석은 이제 반대로 그의 수치(41-17절)를 전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교만한 자의 악한 계획은 끝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나타나게 될 뿐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창 11:1-9, 잠 18:12).

 

왕의 골짜기에 있고

‘왕의 골짜기’는 창 14:17에 나오는 ‘사웨 골짜기’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이곳은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물리친 후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던 골짜기이다. 한편, 혹자는 이곳에 다윗이 거닐며 휴식을 취하던 동산이 있었다고 주장한다(Barrois). 그렇다면 이 왕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바로 근처에 있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곧 기드론 골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왕의 골짜기가 예루살렘에서 약 400미터의 거리에 위치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요세푸스의 주장은 왕의 골짜기가 기드론 골짜기의 어느 한 부분임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Keil, L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