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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보며 성경 읽기/10 사무엘 하

사무엘 하 17장 15절-29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7장 15절부터 29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이 피난길을 떠났을 때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압살롬의 측근이었던 아히도벨은 다윗을 완전히 제거하고 압살롬의 왕권을 강화하려고 계략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을 받아들이자 아히도벨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본문의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7장 15절-29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7장 15절-29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7장 15절-29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7장 15절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사독과 아비아달은 모두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서, 앞서 압살롬의 난을 피해 도피하는 다윗 왕과 함께 동행하려 했으나 다윗 왕이 압살롬의 정세를 캐내도록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낸 자들이다(15:24-29). 따라서 후새는 이제 이들을 통하여 중요한 정보를 다윗에게 전하기 위해 이들과 접촉하고 있다.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후새는 두 제사장들에게 아히도벨의 모사(1-3절)는 물론 자신이 압살롬에게 베푼 모사의 내용(7-13절)까지도 전달해 준다. 이와 같이 후새가 자신의 모사를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알려준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앞으로 압살롬의 전술에 맞설 적절한 작전을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8:1-5).

 

 

사무엘 하 17장 16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오늘 밤에 … 건너가소서

여기서 ‘오늘 밤’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피신해 나오고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이닥친 바로 그날 밤을 의미한다. 1절 주석 참조. 그런데 후새가 여기서 그날 밤 다윗더러 요단 강을 건너라 일러준 것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즉, 후새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계략을 따르지 못하도록 이미 그럴듯한 모사를 베풀었고(7-13절) 또한 압살롬과 그 신하들이 자기의 모사에 동의한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14절), 아직 최후 결정이 내려진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가지고 다윗에게 빨리 강 건너 요단 동쪽 땅으로 피신하라고 통보하였던 것이다(The Interpreter’s Bible, Keil, Payne).

 

 

사무엘 하 17장 17절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 머물고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사독의 아들들이며 제사장들이었다(15:27). 이들은 현재 사독과 아비아달이 캐낸 예루살렘 성내의 정보를 받아 다윗에게 연락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15:36). 따라서 이들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정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라고 기록되었는데 여기서 ‘머물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드’는 ‘서있었다’는 뜻이다(창 19:27, 신 4:10, 19:17, 삼상 19:3, 왕하 5:11, 시 106:23, 사 61:5, 호 10:9). 따라서 여기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연락원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긴장한 가운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이라는 위기 상황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같이 그늘에서 말없이 그리고 충실하게 봉사한 헌신적인 일꾼들이 있었기 때문임은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다.

 

에느로겔

에느로겔은 ‘방랑자의 샘’ 또는 ‘풍성한 샘’이라는 뜻이다. 이 샘은 예루살렘 남동쪽의 기드론 골짜기(15:23)에 위치하였는데, 수맥(水脈)이 골짜기의 지하수층에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강우량이 많은 겨울철에는 지하수가 분출하여 골짜기로 흘러넘치곤 하였다. 따라서 그 이름과 같이 오고 가는 나그네들은 이곳에서 충분한 안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에느로겔이 ‘욥의 우물’과 같은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Keil, Pulpit Commentary), 오늘날의 ‘비르 아이읍’(Bir Ayyub)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여기서 ‘여종’이란 말 앞에는 정관산 ‘하’가 붙어 있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정관사는 종종 특별한 임무를 위해 선택된 자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데 본 절의 경우 역시 이에 해당한다. 즉 본 절에 등장하는 여종은 사독과 아비아달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중요한 정보(15, 16절)를 전달하기 위해 임무를 맡겨 보낸 특별한 종이다(Wycliffe, Lange).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여종은 가사(家事)를 돌보거나 물을 길어오는 일 등을 주로 하였다. 따라서 이 여종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물을 길으러 나오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에느로겔에 나올 수가 있었을 것이다.

 

 

사무엘 하 17장 18절

 

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여기서 ‘한 청년’은 압살롬이 다윗의 은밀한 첩보활동(諜報活動)을 차단하기 위해 풀어놓은 첩자(諜者)라고 볼 수 있다(Pulpit Commentary, Keil). 그것은 이 청년이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압살롬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또한 ‘청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아르’가 성경에서 ‘부하’, 또는 ‘종자’(從者)라는 의미로도 많이 사용된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18:15, 삿 7:10,11, 8:14, 느 4:16, 22, 23, 5:10, 15, 16, 6:5). 한편 이러한 압살롬의 첩자의 눈에 비친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의 행동은 이 첩자의 의혹을 받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사장들인데도 불구하고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6:12-19)을 떠나 성 밖에 에느로겔 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남달리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신분이 다른 하층 계급의 여종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첩자는 이들을 다윗의 연락원으로 단정하고 압살롬에게 즉각 이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바후림 어떤 사람의 …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감람 산을 넘어 요단 강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이다. 16:5 주석 참조. 일찍이 이곳은 다윗 왕이 압살롬으로부터 도피할 때 시므이로부터 혹독한 저주를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같은 장소에서 다윗의 연락원들이 한 여인으로부터 귀중한 도움을 받고 있다. 한편, 바후림의 여인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를 숨겨 주었던 ‘우물’은 물을 저장해놓는 수조(水槽)를 의미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집집마다 수조를 설치해 놓고 거기다 물을 길어 저장하던 것이 보통이었기 패문이다. 추측컨대 아마도 당시는 때마침 건기(乾期)여서 수조가 비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는 그곳에 안전하게 숨을 수 있었을 것이다(Pulpit Commentary, Keil). 아무튼 이들이 수조 속에 숨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Hertzberg).

 

 

사무엘 하 17장 19절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전혀 알지 못하더라

 

덮을 것을 가져다가 … 그 위에 널매

여기서 ‘덮을 것’이란 수조의 뚜껑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위에 널어놓은 ‘찧은 곡식’이란 아마도 ‘껍질깐 보리’(잠 27:22)를 의미하는 듯하다(Keil, Pulpit Commentary). 아무튼 여인의 이 같은 행동은 마치 곡식을 햇볕에 말리기나 하는 듯이 뚜껑 위에 널어놓음으로써, 아무도 수조 속에 사람이 숨어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기만책(欺瞞策)이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여인의 행동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곧 가나안 정탐꾼들을 숨겨준 라합의 용기를 연상시킨다(수 2:4-6). 한편. 만일 이 여인의 이와 같은 도움이 없었더라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 두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요단 강 나루터에 있던 다윗과 그 일행 또한 모조리 몰살당하는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21, 22절, 15:2).

 

 

사무엘 하 17장 20절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여기서 ‘시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칼 하마임’은 ‘작은 시내’ 또는 ‘개울’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기드론 시내(15:28)가 아닌 바후림 근처의 작은 시내를 가리키는 것 같다(Pulpit Commentary).

 

 

사무엘 하 17장 21절

 

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여기서 ‘물’은 요단 강을 가리킨다. 요나단과 아히마하스는 바후림에서 위기를 넘기고 요단 나루터(15:28)에 이른 후, 다윗 왕에게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 빨리 요단 강을 건너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후새의 전갈(15, 16절)을 전해 준다.

 

 

사무엘 하 17장 22절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새벽에 까지 …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이처럼 밤 사이에 다윗과 그의 온 일행이 요단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군사 전략상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이는 무엇보다 먼저 아히도벨의 모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히도벨의 모략은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너기 전에 그를 급습하여 살해하자는 것(1, 2절)이었기 때문이다. (2) 또한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은 일단 압살롬으로부터의 위기를 모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을 재정비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다윗의 요단 강 도하(渡河) 사건은 완전한 성공을 눈앞에 두었던 압살롬의 반역 일정(日程)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무엘 하 17장 23절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아히도벨이 …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압살롬의 모사(謨士)인 아히도벨이 이처럼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은,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사태를 예견하는 뛰어난 능력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압살롬 정권의 연한이 다하였음을 감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모략이 선택되지 못한 것에 대한 서글픔과, 앞으로 다윗 왕에게 당하게 될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공포심과 수치심에 못 이겨 자살의 길을 택하였다(Lange). 한편, 이러한 아히도벨의 죽음은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큰 사건이었다. 즉 아히도벨의 죽음은 압살롬이 이제부터는 다윗 왕을 이길 만한 좋은 계략을 더 이상 얻을 수 없게 되었다는 불리한 상황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온갖 지혜를 동원하여야 할 반란군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치명적(致命的)인 손상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아히도벨의 죽음은 곧 압살롬의 죽음(18:9-15)을 예고하는 서막(prelude)이었다(Hertzberg). 이상과 같은 사실에 의거할 때 결국 아히도벨의 죽음은 다윗의 간절한 기도(15:31)가 최종적으로 응답된 것이며 불의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의를 지닌다(Lange). 이처럼 아히도벨의 자살은 불의한 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는 좋은 예로서, 우리는 이와 비슷한 유형을 훗날 가룟 유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마 27:5, 행 1:18).

 

고향으로 돌아가

아히도벨의 고향은 유다 산지에 위치한 성읍 길로였다. 15:12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7장 24절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마하나임

한때 이스보셋 왕국의 수도였던 마하나임은 갓 지파와 므낫세 반(半) 지파의 기업 경계(基業境界)에 위치해 있었다(2:8 주석 참조). 따라서 이곳은 군사 모집에 유리한 이점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벽과 성문이 있는 요새화된 성읍이었기 때문에(18:24) 다윗의 임시 정부의 거점(據點)으로서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이곳은 과거 야곱이 천사들을 만나 복을 받았던 유서 깊은 성읍인데(창 32장), 이제 다윗도 이곳에서 야곱처럼 하나님이 보내신 세 사람의 도움(27-29)을 받게 된다(C. J. Goslinga).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이는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국민병을 모집하여 인해전술을 사용하자는 후새의 제안(11절)을 따랐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압살롬이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터인데, 그 동안에 다윗은 반격의 태세를 갖추었음이 분명하다(18:1-5). 한편 압살롬이 이처럼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요단 강을 건넜다는 것은 이제 그가 두 가지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중 하나는 다윗 진영이 요새화 된 뒤 마하나임에 안전한 본부를 둔 반면에 압살롬 진영은 무방비 상태의 들에 진을 쳐야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윗 왕이 마하나임 성읍에서 군사를 지휘한 반면(18:3) 압살롬은 직접 전쟁에 나섬으로써 다윗 왕보다 훨씬 더 죽음의 위험이 컸다는 점이다(Payne). 그런데 이는 바로 후새가 의도한 바였다. 즉 후새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유도해 내려고 압살롬에게 아히도벨의 것(1-3절)과는 반대되는 모사를 베풀었던 것이다(11절).

 

 

사무엘 하 17장 25절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아마사

다윗의 조카이자 요압의 사촌이다(대상 2:13-17). 따라서 그는 압살롬과는 고종 사촌간이다. 혹자는 아마사가 다윗의 30인 용사의 두목인 아마새(대상 12:17, 18)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나(Ewald, Bertheau, Pulpit Commentary), 확실치는 않다. 한편 아마사는 압살롬 사후에 다윗의 군장(軍長)이 되었으나 기회주의자인 요압에게 살해당하였다(20:10).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

아마사의 아버지인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는 대상 2:17에서는 ‘이스마엘 사람 예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 ‘예델’은 ‘이드라’의 축약형이라고 볼 수 있다(Pulpit Commentary).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드라가 과연 ‘이스마엘’ 사람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인지 분명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대상 2:17의 기록대로 그는 이스마엘 사람인 것 같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는 외국인이 아닌 경우에는 그 사람의 국적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The Interpreter’s Bible). 이렇게 볼 때 이드라는 이스마엘 사람인 것이 분명해지는데, 그렇다면 그를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본 절의 기록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대개의 학자들이 이드라가 이스마엘 사람이었으나 이스라엘 여인(아비갈)에게 장가들어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한다(Hertzberg). 즉. 이드라는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아내와의 연고(緣故)로 이스라엘인으로 국적을 바꾼 외국인(히, 게르)이었다는 말이다.

 

나하스의 딸 아비갈

아비갈은 일명 아비가일로도 불렸는데, 곧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와 자매지간이다(대상 2:16). 그러나 나하스가 누구인가에 대하여서는 분명히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학자들은 여러 주장들을 내세우고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나하스는 아비갈의 첫 남편이었다는 견해이다(Hertzberg, Michaelis, Schultz). 그러나 이는 아비갈이 나하스의 딸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는 본 절과 상치된다(공동번역). (2) 나하스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둘째 부인이었다는 견해이다(Movers, Thenius). 그러나 히브리 사회에서 ‘나하스’란 이름은 남자의 이름이었다(Pulpit Commentary). (3) 나하스는 이새의 별명이었다는 견해이다(Kimchi, Pulpit Commentary). 그러나 본서 저자가 혼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이새의 별명을 사용한 까닭을 이해하기 어려우며, 또한 나하스가 이새의 별명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다(Keil). 이상에서처럼 기금껏 제시되고 있는 학자들의 견해 중 어느 정도라도 타당성을 지닌 견해는 아직 없다. 그러면 과연 나하스는 누구일까? 이에 대하여 우리는 본 절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본서 저자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을 스루야의 동생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즉, 여기서 저자는 왜 아비갈을 직접적으로 다윗의 누이라고 소개 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 아비갈이 다윗의 완전한 동생(full sister)이 아니기 때문이었음을 증거해 준다. 즉, 아비갈은 스루야와는 완전한 자매지간이었으나 다윗과는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만 같은 이부동복(異父同服)의 관계였다. 따라서 본서 저자는 아비갈을 다윗과의 관계에서 보다는 스루야와의 관계에서 소개한 것이다. 그렇다면 본 절의 문자 그대로 나하스는 아비갈의 아버지임이 분명하다. 때문에 공동번역도 나하스를 가리켜 아마사의 외조부(外祖父)로 언급하고 있다.

 

 

사무엘 하 17장 26절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여기서 압살롬의 군대 장관 아마사(25절)의 이름이 빠져 있고 대신 압살롬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길르앗 땅에 진 친 이스라엘 병력을 압살롬이 직접 진두지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Hertzberg). 따라서 이제 압살롬은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하려 한 후새의 계략에 말려든 셈이다. 11절 주석 참조.

 

 

사무엘 하 17장 27절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

소비는 암몬의 전왕(前王) 나하스의 아들이며 하눈의 동생이다(10:1 주석 참조). 그가 이제 다윗에게 와서 도움을 준 것으로 보아, 그는 자기의 형 하눈과는 달리 자기 아버지 나하스와 다윗 왕 간의 친분 관계를 기억하고 다윗과의 교제를 유지하려 한 듯하다(Ewald). 아니면 그는 랍바 성이 정벌당한 후(12:26-31) 다윗에 의해 어느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받았을 가능성이 높다(The Interpreter’s Bible).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

마길은 일찍이 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 므비보셋을 보호해 준 사람이다(9:4). 아마도 그는 지난날 므비보셋에게 큰 사랑을 베풀었던 다윗의 호의를 기억하고 지금 다윗을 도우러 왔을 것이다(Pulpip Commentary, Payne). 즉 그는 다윗의 인격에 감명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이제 위기에 빠진 다윗을 생각하고 그를 도왔다.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

로글림은 길르앗의 한 성읍인 바, 바르실래는 이 성의 거부였다(19:32). 이 사람이 다윗을 도우러 온 이유에 대하여서는 확실히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다윗 왕의 훌륭한 통치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을 가능성이 높다(Payne). 즉 길르앗(Gilead)은 요단 강 동편의, 북으로는 야르묵 강에서 남으로 아르논 강 사이에 있는 광활한 땅인 바아람 사람들의 침략이 용이한 지역이었다. 삿 5:17 주석 참조. 그러나 이제 다윗의 강력한 군사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 지역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8장). 따라서 이 지역의 부호들은 다윗 왕의 강력한 통치에 상당히 감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다윗에게 나아온 사람들이 모두 다윗 왕의 인격이나 통치력에 감복(感服)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윗이 평소에 얼마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려 힘썼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해준다(8:15).

 

 

사무엘 하 17장 28절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28절-29절의 개요

이처럼 소비, 마길, 바르실래가 다윗 일행에게 제공한 물건들은 전쟁을 준비하는 병사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필수품(必需品)들이었다. 그중 여기서 침상(히, 미쉐캅)은 담요 등의 침구를 가리킨다. 그리고 ‘대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폿트’는 본래 대접이란 뜻이나, 여기서는 야외용 가마솥을 의미하는 듯하다(Lange, Keil). 또한 ‘볶은 곡식’과 ‘볶은 녹두’는 히브리 원어에서는 모두 같은 단어인 ‘칼리’인 바, 추측컨대 이는 각기 다른 곡식들을 볶은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Lange, Pulpit Commentary). 아무튼 황급히 피신하느라 제대로 행장(行裝)을 갖추지 못했던 다윗 일행(15:13-18)에게 이처럼 풍성한 구호물이 제공된 것은, 다윗을 지켜 보호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7:8-16).

 

 

사무엘 하 17장 29절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