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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보며 성경 읽기/10 사무엘 하

사무엘 하 18장 19절-33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8장 19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죽은 이후에 다윗에게까지 그의 죽음의 소식이 전해지는 장면입니다. 아버지로서 애타게 아들의 생사를 염려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매일성경큐티와 새벽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자료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8장 19절-33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8장 19절-33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8장 19절-33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8장 19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아히마아스 …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다윗 왕의 연락원 아히마아스(15:27, 36, 17:17-22)가 다윗 군의 승리를 다윗 왕에게 전달하겠다고 자원한다. 이처럼 아히마아스가 이 일을 자원한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그가 다윗 군의 승리만을 알았을 뿐 압살롬의 죽음(14-17)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Hertzberg). 그러면서 그들은 그 증거로서, ‘젊은 압살롬이 잘 있느냐’는 다윗 왕의 물음에 ‘잘 알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한 것(29절)을 든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 왕의 연락원이었던 아히마아스가 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던 압살롬의 죽음을 몰랐었다고 추측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20절에서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고 한 요압의 말은 이미 아히마아스가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따라서 우리는 압살롬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히마아스가 이 일을 자원했다고는 볼 수 없다. 추측컨데 아히마아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다윗 왕에 대해 진정한 동정심(同情心)을 품고 있었기에 본 사건을 보다 부드럽게 전하려고 이 일을 자원했을 것이다(Payne, Rust).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본 절을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들의 손으로부터 심판하셨다’는 뜻이다. 여기서 아히마아스가 ‘ … 로부터’(히, 민)란 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원수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Keil). 즉 아히마아스는 다윗 군의 승리를 다윗 왕을 원수의 세력에서부터 해방시키시기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서 이해하였다(Lange).

 

 

사무엘 하 18장 20절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요압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14-17절) 이처럼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승전(勝戰)의 소식을 전하는 것을 금하였다. 즉, 요압은 이번에는 이 일에 아히마아스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히마아스는 지금까지 좋은 소식만을 전달한 다윗의 부하였으므로 이번에도 다윗은 그가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줄로 착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27절). 따라서 요압은 압살롬의 죽음을 알리는 이번 일에는 아히마아스가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다음번에 연락원의 임무를 수행하라고 권고했다.

 

 

사무엘 하 18장 21절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성경에 나오는 구스, 즉 에디오피아는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를 수도(首都)로 삼고 있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와는 다르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구스(민 12:1, 대하 14:9-15, 행 8:27-39)는 오늘날의 수단(Sudan) 북부와 이집트의 남부 사이에 위치한 누비아(Nubia) 지방을 영토로 삼았던 나라이다. 또한 사료(史料)에 따르면 구스는 애굽 왕 세소스트리스 1세(Sesostris I, B.C. 1971-1930)의 치세 하에 예속되어 있다가 B.C. 1000년 경에 독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후 이 구스 왕조는 B.C. 715-663년에 에굽을 통치하기도 하였는데, 애굽인들은 이를 자신들의 제25왕조(누비아 왕조)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에 나오는 ‘구스 사람’이 바로 이 에티오피아인인데, 아마 그는 다윗 왕의 노예로서 이번 전쟁(1-4절)에 참전하였던 것 같다. 한편, 요압이 이번의 흉사(凶事)를 다윗에게 알리는 일을 이 구스인에게 맡긴 까닭은 아마 그가 외국인 인데다 다윗 왕의 노예였으므로 아무런 부담감 없이 압살롬의 죽음을 알릴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Rust). 또한 다윗 왕이 이 구스인 전령(傳令)을 보는 순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예감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윗 왕의 충격 완화를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무엘 하 18장 22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이 소식으로 … 상을 받지 못하리라

이 말의 원문을 직역하면, ‘네게 보여진 소식은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너에게 유익(상급)이 될 만한 소식은 없다’(Böttcher, Thenius)는 의미이다. 즉 요압은 전쟁에서의 승리(6-8절) 보다도 압살롬의 죽음(14-17절)이 다윗 왕에게 더욱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식을 전하려고 하는 아히마아스를 자제시키고 있다.

 

 

사무엘 하 18장 23절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여기서 들길은 ‘요단 계곡의 길’을 의미한다(Keil, Lange, The Interpreter’s Bible, Wycliffe Bible Commentary). 이 길은 평평한 평지의 길이었으므로 빨리 달릴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구스인은 에브라임 수풀(6절)에서 마하나임으로 가는 직선거리를 택하였던 것 같다. 그 길은 비록 거리상으로는 짧은 길이었으나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험란한 길이었다. 따라서 아히마아스가 비록 구스인보다 늦게 출발하였지만 구스인을 추월할 수 있었다(Hertzberg, Wycliffe Bible Commentary).

 

 

사무엘 하 18장 24절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여기서 ‘두 문 사이’란 성의 외문(The outer gate)과 내문(The inner gate) 사이를 의미한다(Keil, Hertzberg, Lange). 이곳은 파수꾼의 성문루(城門樓)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 따라서 다윗 왕은 하루 종일 이곳에 앉아 초조한 마음으로 전쟁터에서 기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무엘 하 18장 25절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저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전쟁에서 아군이 패배할 경우에는 여러 명의 패잔병들이 도망쳐 올 것이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승리하였을 경우에는 한 사람이 승리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달려올 것임은 기정 사실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성으로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다윗 왕은 이제 승리의 소식 알리는 연락병이 오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무엘 하 18장 26절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사무엘 하 18장 27절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이로 보아 아히마아스는 평소 그 달음질하는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익을 정도로 빠르게 뛰어다니는 습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파수꾼은 대뜸 그 걸음걸이를 보고서도 달려오는 자가 아히마아스라는 사실을 알았다(Lange, Keil).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여기서 ‘좋은 사람’이란 말은 물론 ‘다윗 왕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책무(責務)를 소흘히 하지 않는 사람’이란 의미일 것이다. 즉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전장(戰場)에서 혼자만 도망쳐 올 정도로 비겁하거나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였기에 아히마아스의 입에는 자신들이 기대하던 ‘좋은 소식’, 곧 승전보(勝戰報)가 담겨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히마아스가 이렇게 평가되기까지에는 평상시 그가 주위 사람들에게 참으로 신뢰받을 만한 삶의 모범을 보여 왔으리라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향기로운 인품은 갑작스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꾸준히 그 모습을 갖추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무엘 하 18장 28절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주셨나이다 하니

 

평강 하옵소서

히브리어로 ‘솰롬’인데, 이 인사말은 ‘건강, 행복, 평화, 안녕’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히브리인들은 이 같은 인사말을 하면서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 영존(永存)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사 자신들을 참된 평강으로 인도하시기를 기원하는데, 이는 곧 메시아 대망(待望) 사상과도 연결된다. 그런데 본 절에서 아히마아스는 다윗에게 이같은 인사말을 하면서 특별히 두어 가지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곧 전쟁 후의 평화와, 압살롬의 죽은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이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같은 인사는 곧 자신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상대방을 높이는 겸양의 자세이다. 여기서 아히마아스는 다윗 왕에 대한 충성과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신하의 예(禮)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14:22 주석 참조.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주셨나이다

여기서 ‘그의 손’은 ‘하나님의 손’이다. 그리고 ‘넘겨주셨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가르’는 ‘가두다, 폐쇄하다’는 뜻이다 (창 19:6, 10, 시 17:10, 겔 46:12, 출 14:3). 따라서 본 절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반란자들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묶어주셨다는 뜻이다. 즉 이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다윗 군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말이다.

 

 

사무엘 하 18장 29절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다윗 왕은 아히마아스에게 무엇보다도 압살롬의 생존 여부부터 물었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으로서 반란군의 진압 성공 여부부터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도, 아버지로서의 강한 부성애(父性愛)를 먼저 나타냈다.

 

나를 보낼 때에 …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압살롬의 생사 여부에 관한 다윗 왕의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는 아히마아스의 말이다. 즉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이 다윗 왕에게 큰 충격이 될 줄 알고 있었으므로 여기서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였다. 이는 분명 다윗 왕에 대한 그의 동정심에서 나온 행동일 뿐만 아니라, 요압의 언질을 기억한 행위이다(Hertzberg). 즉. 요압은 아히마아스에게 이는 상 받을 만한 소식이 아니므로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다(22절).

 

 

사무엘 하 18장 30절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이처럼 다윗 왕이 아히마아스를 물러서게 한 것은 곧이어 구스 사람이 당도하였기 때문이다(24-27, 31절). 한편 여기서 ‘서 있으라’에 해당하는 ‘야차브’는 임무가 끝났기 때문에 자리로 돌아가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어떠한 목적이나 임무 수행을 위해서 있으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출 8:20, 9:13, 신 31:14, 삼상 10:19, 12:7, 욥 33:5, 렘 46:14). 따라서 다윗 왕이 아히마아스에게 거기 서 있으라고 명령한 것은, 구스 사람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후에 아히마아스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더 듣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무엘 하 18장 31절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보고하였던 것과 같은 내용이다(28절). 아마도 구스인은 무엇보다도 다윗이 전쟁의 결과를 궁금히 여기리라 생각하고 먼저 이 같은 보고를 올렸을 것이다.

 

 

사무엘 하 18장 32절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29절에 이어 다윗이 다시 압살롬의 신변부터 염려하고 있는 장면이다. 이는 분명 지금껏 다윗을 위하여 목숨의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반란군을 무찔렀던 다윗의 군사들(1-8절)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19:5, 6). 훗날 요압이 아도니야와 손을 잡고서 솔로몬에게 반역한 것(왕상 1:7)도 이러한 다윗의 태도에 실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왕의 원수 …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압살롬의 죽음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구스인의 보고이다. 그런데 여기서 구스인이 압살롬의 죽음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언급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즉 비극적인 소식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화(禍)를 당하리라는 공공연한 인식(19-22절)에도 불구하고, 구스인은 압살롬의 죽음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의 그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큰 감동을 던져주는데 사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우주 통치권을 믿는 자라면 이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진실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다(단 3:16-18, 행 4:17-21).

 

 

사무엘 하 18장 33절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여기서 ‘마음이 심히 아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가즈’는 본래 ‘떨다, 전율(戰慄)하다’는 뜻이다(22:8, 출 15:14, 삼상 14:15, 시 18:7, 77:16, 99:1). 따라서 본 절은 다윗 왕이 압살롬의 죽음 소식을 접한 후 극심한 충격과 함께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비탄에 빠진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올라갈 때에

여기서 ‘올라갈’이란 말은 바로 앞에 나온 동사 ‘올라가서’와는 다른 용어이다. 즉, 앞의 동사 ‘올라가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라’는 ‘밑에서 아래로 올라가다’는 뜻이다(15:24, 창 19:28, 출 8:3). 그러나 여기서 ‘올라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얄라크’는 ‘행하다, 나가다’는 뜻이다(창 11:31, 출 33:16, 레 18:4, 신 8:6, 10:12, 왕상 2:3, 4). 따라서 이 말은 앞의 경우처럼 다윗 왕이 문 위층에 올라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없다. 대신 이 말은 위층에 이미 올라간 다윗 왕이 이리저리, 또는 미친 듯이 다니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 절은 다시 ‘그가 이리저리 배회할 때에’, 또는 ‘그가 미친 듯이 방황하면서’로 번역할 수 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이러한 다윗 왕의 절규에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슬픔이 내재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죽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본능적 비탄이다. 자신의 범죄(11장)가 가져온 뿌리 깊고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12:10-12)에 대한 아픔이다. 즉 다윗 왕은 여기서 압살롬의 죽음이 자기의 죄의 결과임을 절감하면서 흐느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자신의 범죄로 인해 이미 두 아들을 잃었는 바(12:15-19, 13:30-39), 이제 또 압살롬을 잃게 되자(14, 15절) 자신의 뼈아픈 과거의 죄가 기억나서 통한(痛恨)의 울음을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격정적인 절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지금껏 압살롬을 대항하여 싸웠던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것이었다. 32절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