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9장 1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은, 아들 압살롬이 죽음으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진 다윗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윗이 큰 소리로 울자, 요압이 충언을 하고, 다윗은 마음을 정리합니다. 깊은 슬픔 속에 빠진 아버지 다윗에 관한 본문을 매일성경큐티하고 새벽설교로 준비하기 위한 주석과 해설을 정리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9장 1절-15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9장 1절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이는 성내에 있던 한 사람이 이제 막 전쟁터로부터 회군(回軍)하여 돌아오는 요압에게 달려가 다윗 왕의 동정(動靜)을 보고한 사실을 의미한다. 이 사람이 이처럼 요압에게 달려가 왕의 슬픔을 알린 이유는 개선하는 군사들을 맞이하는 대대적인 환영식(歡迎式)이 없는 데 대하여 요압과 군사들의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Lange).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여기서 ‘울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카’는 ‘애곡하다, 호곡하다’는 뜻으로 곧 ‘소리 내어 크게 우는 것’을 의미한다(13:36, 창 45:14, 신 21:13, 스 10:1, 왕하 20:3, 22:19, 애 1:2).
사무엘 하 19장 2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압살롬의 군대를 쳐부수고 돌아오는 그날 요압에게 보고된 사실이 개선(凱旋)하는 군사들에게 소문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이다.
그날의 승리가 … 슬픔이 된지라
이는 승전(勝戰)한 다윗의 군사들이 매우 처량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 한 사람의 절제되지 못한 감정 처리가 공동체에 심각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승리’에 해당하는 ‘테슈아’란 말은 어떤 고통이나 속박 또는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구원’ 또는 ‘구출’을 가리키는 전쟁 용어이다.
사무엘 하 19장 3절
그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부끄러워 …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이는 승전한 군사들이 마치 패잔병(敗殘兵)들처럼 슬며시 입성(入城)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특히 여기서 ‘부끄러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칼람’은 더러운 죄를 범한 사람이 자기의 죄를 부끄러워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겔 16:27, 61, 43:11, 사 45:16). 따라서 이 말은 다윗의 군사들이 승전한 군사들의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크게 죄를 지은 자들과 같이 초라하고 처량한 모습으로 입성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우리는 개선하는 군사들을 맞이하는 대대적인 입성식 또는 환영식이 전혀 없었뿐만 아니라 군사들 조차도 대오(隊伍)를 맞추어 의기양양하게 입성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뿔뿔이 흩어져 입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사무엘 하 19장 4절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왕이 그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부르되
이는 승전의 소식(18:28-32)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압살롬의 죽음만을 생각하는 다윗 왕의 비통한 심경을 보여준다(Wycliffe Bible Commentary). 즉 여기서 얼굴을 가린 것은 왕의 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표시였으며(사 53:3), 또한 큰 소리로 부르짖은 것은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자신의 슬픈 감정을 터뜨린 행위였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성경 문학상 감정을 점층적으로 고양시키는 반복법적(反復法的) 표현이다. 이토록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절규한 이유는 자신의 양심에 저리도록 사무치는 회한(悔恨)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의 처절한 애곡 속에는 단순히 아버지로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혈육의 정 뿐만 아니라 과거 자신이 지은 죄악의 보응이라는 심한 자책감이 깃들어 있다.
사무엘 하 19장 5절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 드리되
업무를 전폐하고 압살롬의 죽음만을 비통해하는 다윗의 행동에 대해 정치적 불안을 느낀 요압은 민심(民心)의 동요를 우려하여 백성들의 대변인(vox populi)으로 자처하였다(Hertzberg). 비록 요압이 다윗의 깊은 심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약간 무례하고 강경한 어조로 항변한 것은 사실이지만(Smith), 당시 요압의 이러한 행동은 다윗 왕으로 하여금 그의 걷잡을 수 없었던 감정을 정리할 수 있게 해 준 적절한 직언(直言)이었다.
왕의 생명과 … 생명을 구원한
여기서 요압은 이번 전쟁의 승리로 말미암아 왕과 그 모든 가족의 생명이 구출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요압의 말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압살롬이 이번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더라면, 그는 고대 근동 지방의 관습에 따라 선왕(先王)과 선왕의 모든 가족들을 몰살시키고야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Smith, Lange).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아낌없는 칭찬과 대대적인 환영을 받아야 될 모든 군사들에게 오히려 수치를 안겨 준 다윗 왕의 처사를 책망하는 말이다. 즉, 여기서 요압은 승전한 군사들을 기쁘게 영접하고 칭찬하는 것이 왕의 중요한 임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감정에 매여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만 저하시킨 왕의 무책임한 처사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사무엘 하 19장 6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미워하는 자
곧 다윗 왕에게 반역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가리킨다.
사랑하는 자
곧 다윗 왕을 위하여 목숨 걸고 싸워 압살롬의 군대를 쳐부순 ‘다윗 왕의 부하들’을 가리킨다.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이 구절에 대한 보다 정확한 해석은 ‘오늘 당신은 당신에게 지휘관들과 부하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하셨나이다’이다(F. R. Fay). 즉 지휘관들과 부하들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자들처럼, 다윗 왕은 그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말이다.
만일 압살롬이 살고 …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요압의 말대로 만일 압살롬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왕과 그 가족 모두는 압살롬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다윗 왕이 이와 같은 결과를 참으로 바라고 있었던 듯이 표현한 요압의 이 말은 너무나도 무정한 말이었다(R. Payne Smith). 먼저 요압은 여기서 다윗의 슬퍼하는 심정을 올바로 이해함이 없이 거침없이 말하였다. 즉 다윗의 슬픈 감정은 단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뼈저린 뉘우침이기도 하였는데, 요압은 이러한 다윗의 속사정을 몰라주고 거침없이 말하였다. 또한 요압은 슬퍼하는 다윗의 감정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다윗 왕은 비록 지금은 슬퍼하고 있지만 이번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말속에서 요압의 거칠고 사나운 기질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요압의 사나운 비난은 오히려 다윗 왕으로 하여금 자기의 임무를 다시 깨닫게 한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이는 요압이 비록 무정한 사람이긴 했지만, 백성들의 소리를 그대로 대변했기 때문이다.
사무엘 하 19장 7절
이제 곧 일어나 나가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하니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이 구절의 원문을 직역하면, ‘부하들의 마음에 말씀하소서’가 된다. 이는 곧 부하들의 불평을 달래면서 그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라는 권면이다.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혹자들(Josephus, Matthew Henry)의 주장처럼, 이는 요압이 자신의 반역 의사를 내비친 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요압은 여기서 다윗 왕이 계속해서 자기의 슬픈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자연적으로 민심이 동요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다시 왕위를 노리는 반란이 이어지게 될 것이고, 이제 또다시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도 높게 경고한 것이다.
사무엘 하 19장 8절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어떤 사람이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신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고대 사회에서 성문(城門)은 매매, 행정, 집회 등의 주무대였다(룻 4:1, 2, 삼상 9:18, 욥 29:7, 암 5:10, 12). 아울러 성문은 왕이 백성들과 만나는 장소였으며 왕의 재판 장소였다(15:2). 따라서 다윗 왕이 이곳(마하나임의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자신의 임무를 다시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군사들을 치하 격려하고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 왕의 올바른 깨우침을 볼 수 있다. 즉 요압의 권고가 비록 거칠고 무정한 점은 있었으나, 다윗 왕은 그 말이 정당함을 인정하고 요압의 호소를 그대로 따랐다(Keil). 그러나 결국 다윗의 이 같은 결단이 있기까지에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위로가 있었을 것이다(시 40:17, 56:13). 인간의 사정을 그 당사자보다 더 깊이 이해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는 진정 근심과 슬픔과 절망에 짓눌린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대상 28:9, 잠 16:2,3).
모든 백성이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 말은 왕 앞에서 군대의 개선 행진이 있었으며, 또한 승리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 왕과 백성들 간에 즐거운 대면이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Keil, Smith).
이스라엘은 … 도망하였더라
여기서 ‘이스라엘’은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했던 무리들을 가리킨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이들은 더 이상 저항할 명분과 기력을 상실하고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자기 장막(처소)으로 도피했다. 따라서 이제 나라는 평화를 되찾고, 새로운 상황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사무엘 하 19장 9절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이르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가셨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여기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는 유다 지파를 제외한 모든 지파를 가리킨다. 그리고 ‘변론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둔’은 ‘다투다, 정죄하다’는 뜻이다(창 15:14, 욥 36:31, 시 110:6, 전 6:10). 따라서 이 구절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사람들이 다윗 왕 복권의 지체(遲滯)에 대하여 서로를 책망하였다는 말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은 지난날 압살롬을 지지했던 자기들의 행동이 크게 잘못된 것이었음을 스스로 자각했기 때문이었다(Keil).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된 후 백성들이, 과거 다윗 왕이 자기들을 위해 세운 큰 공적을 회상하는 말이다. 즉, 다윗 왕의 순간적인 실수에 대한 반발과 압살롬의 수려한 외모에 반하여 압살롬의 반란에 참여했던 백성들이, 이제 상황이 달라지자 다윗 왕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사무엘 하 19장 10절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
우리가 기름을 부어 …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거늘
우리는 이 구절에서 압살롬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하는 공식적인 행사, 곧 기름 부음 받는 의식(儀式)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의식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한 무리들을 ‘이스라엘 온 무리’라 일컬었고, 다윗의 군사들을 ‘백성들’이라 일컬었던 것으로 추측된다(Pulpit Commentary). 또한 ‘다윗 왕이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다’고 한 9절의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아무튼 압살롬의 공식적인 즉위식(卽位式)은 다윗 왕의 복권(復權)에 다소 장애가 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윗 왕이 복권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 선언이 또다시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다윗 왕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예루살렘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마하나임 성에 그대로 남아 백성들의 대대적인 지지 선언을 기다렸다. 한편,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의 복권 이유로 압살롬의 전사(戰死)를 들고 있다. 즉, 그들이 지지했던 압살롬이 이제는 죽고 없으니, 다윗 왕을 복권시키자는 논리였다. 우리는 여기서 만일 압살롬이 살았더라면 그들이 압살롬을 계속 지지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R. Payne Smith). 따라서 다윗 왕을 복권시키자는 그들의 소리는 다분히 이해타산적이며 현실적인 것이었다(Herzberg). 우리는 이와 같은 움직임 속에서 당시 백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즉, 한편에서는 지난날 압살롬을 지지했던 자기들의 과오를 인정함과 동시에 다윗 왕을 다시 존경하면서 그의 복권을 주장하는 참신한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아직껏 압살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만 그가 죽었으므로 나라의 안정을 위해 다윗 왕의 복권을 주장한 현실주의자들도 있었으며, 또는 이미 대세(大勢)가 다윗 왕에게로 기운 것을 파악하고 재빨리 친(親) 다윗계로 처신하는 기회주의자들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다윗 왕에 대한 또 하나의 반란을 예상할 수 있다(20:1-26).
사무엘 하 19장 11절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다윗 왕이 … 두 제사장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는 다윗 왕이 유다 지파와의 교섭을 위해 당시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두 제사장, 곧 사독과 아비아달을 교섭의 실무자(實務者)로 임명하는 장면이다. 다윗 왕이 이처럼 유다 지파와의 교섭을 시도하게 된 동기는 다른 이스라엘 지파 내에서 일어났던 다윗 왕의 복권 추진 움직임 때문이었다(9, 10절). 즉 (1) 만일 이스라엘 지파들만이 다윗 왕을 지지하는 가운데 그가 복권된다면, 다윗 왕과 유다 지파 사이는 대단히 소원(疏遠)한 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2)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가 다윗 왕을 지지하지 않을 경우, 다윗 왕을 복권시키겠다고 나선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은 그들의 왕을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성읍으로 모실 위험성까지 있었다(Wycliffe Bible Commentary). (3) 또한 다윗 왕은 자기가 이스라엘 지파들에 의해서만 복권될 경우, 자기의 통치력이 심히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Hertzberg). 왜냐하면 다윗 왕은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만일 타 지파에서 반란을 일으킬 경우 그를 지지할 지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윗 왕은 자신이 복권하는데 유다 지파도 적극 참여시킴으로써, 과거 압살롬의 반역을 주도했던 유다 지파의 죄를 용서하고 온 나라의 총화 단결을 도모하고자 했다(Leon Wood).
유다 장로들
이들은 유다 지파를 다윗 왕에게로 돌릴 수 있는 실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침묵한 것은, 이들이 압살롬의 반란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다윗 왕이 복권된 후 자기들에게 미칠 후환(後患)을 우려하여 잠자코 있었다(R. Payne Smith).
사무엘 하 19장 12절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오 하셨다 하고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거늘
여기서 다윗 왕은 자기가 유다 지파 출신이므로 유다 지파 바로 그들이 자기의 복권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다윗 왕의 말은 자기를 반역한 유다 지파에 대해 유화정책적(宥和政策的)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다윗 왕의 제안은 유다와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였다. 즉 다윗 왕의 제안을 받아들인 유다 지파는 다윗 왕의 복권에 적극 앞장서게 되었으며, 이에 대해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이 불평하는 결과를 초래했다(40-43절). 그리고 그 결과로써 이스라엘은 세바의 난에 참여하게 되었다. 한편 여기서 ‘골육’(骨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쳄 우바사르’를 직역하면, ‘뼈와 살’(bone and flesh)이란 뜻이다. 이는 곧 피를 나눈 친척이나, 또는 자기 신체의 일부라 할 정도로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자에게 사용되는 히브리 문학의 한 표현이다.
사무엘 하 19장 13절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압살롬의 군장(軍長)이었던 아마사는 실제로 다윗 왕의 조카였으며, 요압과는 사촌지간이었다(17:25, 대상 22:16, 17).
요압을 이어서 …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여기서 다윗 왕은 요압을 축출하고 새로이 아마사를 자기의 군장으로 삼으려 한다. 이처럼 다윗 왕이 요압을 축출하려 한 이유는 요압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인상 때문이었다. 즉 (1) 요압은 다윗 왕이 죽이지 말라고 당부한 압살롬을 죽였으며(18:14), (2) 또한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하여 다윗 왕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사납고 거친 비난을 서슴치 않았던 자였고(5-7절, Hertzberg), (3) 그리고 요압은 다윗 왕의 집권 초기에 사울의 군장 아브넬을 부당하게 죽인 난폭자였다(3:27, 39). 그러나 이러한 요압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 외에 또 다른 측면에서 다윗 왕은 아마사와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즉 (1) 다윗 왕은 당시 반란군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반대 세력들을 모두 규합(糾合)하려고 하였다(The Interpreter’s Bible, The Wycliffe Bible Commentary). (2)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로서, 다윗 왕은 아마사를 자기의 군장으로 삼음으로써 자기를 반역했던 모든 압살롬의 추종자들에게 자기는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Payne). 그러나 이러한 다윗의 아마사 등용 정책은 불공평하고 현명치 못한 처사였다(Smith). 즉 다윗은 화합이라는 대전제 아래 무모한 관용과 앞뒤를 가늠하지 않은 결단을 함으로써 재난의 불씨를 만들고 말았다(20:10). 특히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살해한 요압(4:14, 15)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있었다 하더라도 요압은 반란군 진압의 공헌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요압을 제쳐놓고 반역의 최일선에 섰던 자를 군대의 통솔자로 삼은 것은 다윗의 실수로 밖에 볼 수 없다. 즉 그 때 다윗은 공의로운 통치 원리보다 인간의 이해를 우선 순위에 두었다. 이처럼 인간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거나 실수를 범하게 마련이다(마 26:69-75). 결국 이러한 다윗의 처사에 앙심을 품은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한 점(20:8-13)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의 다윗의 처사는 시기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결코 현명한 처사는 아니었다고 판단된다(Keil, Wycliffe Bible Commentary).
사무엘 하 19장 14절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그들이 왕께 전갈을 보내어 이르되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매
여기서 ‘기울게 하매’의 주체는 아마사나 대제사장들(사독과 아비아달)이 아니라 바로 다윗 왕이다. 즉, 본 구절에서 저자는 유다 지파에 대한 다윗 왕의 지혜로운 정책(11, 12절)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묘사하고 있다(Keil, Lange).
사무엘 하 19장 15절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길갈로 오니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압살롬의 추격을 피해 급히 요단 강을 건널 때(17:22)와는 정반대의 상황 속에서, 다윗은 자신의 권속과 승전한 군대를 거느리고 요단 강에 이르렀다(F. R. Fay).
요단을 건너가게 하려고
이는 ‘다윗 왕을 호위하여 무사히 요단 강을 건너도록 하기 위하여’란 뜻이다(Keil).
길갈
구약 성경에서 길갈은 여러 곳의 지명으로 나타난다. 즉 엘리사의 길갈(왕하 2:1-4), 갈릴리에 있는 길갈(수 12:23), 유다의 경계 지역에 있는 길갈(수 15:7), 에발 산 근처에 있는 길갈(신 11:30) 등이 있으나, 여기의 길갈은 여리고 근처, 곧 요단 강가의 길갈을 의미한다. 이곳은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넌 후 진을 치고 12지파의 기념비를 세운 곳이다(수 4:19, 20). 한편 이곳은 바로 요단 강가에 위치했으므로, 유다의 장로들이 다윗 왕을 맞이하는 데 편리한 곳이었다(R. Payne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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