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15장 24절-37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5장 24절부터 37절까지의 말씀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다윗이 도망갈 때의 장면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까지 예루살렘에 그대로 두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시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모사 후새를 압살롬 진영에 보냈습니다. 본문을 통독하고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큐티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15장 24절-37절, 주석과 해설 정리
사무엘 하 15장 24절
보라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하나님의 궤를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도다
사독과 … 레위 사람도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다가
이처럼 사독과 그와 함께한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언약궤를 메고 나와(6:12-19) 다윗과 동행하려 한 사실은, 그들 전체가 다윗 왕을 지지하고 나섰음을 의미한다(Payne, Matthew Henry). 즉 그들은 단지 내란 중(10-12절)에 언약궤를 안전히 보호해야겠다는 의도보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인 언약궤를 다윗 편에 둠으로써 장차 전투에서 다윗 왕에게 유리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하였을 것이다. 한편 사독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의 후손으로서, 다윗 치하에서 아비아달 가문과 더불어 제사장직을 수행하던 자이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8:17 주석을 참조하라.
내려놓고 … 기다리도다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내려놓은 장소는 기드론 시내(23절) 건너편에 위치한 감람 산이다(30절). 즉, 사독과 레위인들은 예루살렘 성내의 사람들이 미처 다 빠져 나오지 못하자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감람 산에 언약궤를 잠시 안치해 놓고서 기다렸다.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여기서 ‘올라오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알라’는 ‘밑에서 위로 올라간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아비아달이 예루살렘에서 감람 산으로 나아간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성경에서 ‘알라’가 ‘제물을 드리다’는 뜻으로 사용된 극히 제한된 경우(24:22, 삼상 2:28, 왕상 3:15)를 들어, 혹자는 이 말이 아비아달의 제사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도 주장한다(Michaelis, Böttcher). 그러나 그들이 증거 구절로 제시한 본문들에서는 제사와 관련된 제물이나 기구 등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 본문에는 그러한 언급이 없으므로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피신 길에 오른 다윗 일행과 합류하려고 예루살렘을 빠져나온 아비아달이 그 와중에서 제사를 드릴 시간적인 여유를 가졌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한편 아비아달은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8:17, 삼상 21:1, 22:20)의 아들로, 아론의 넷째 아들 이다말의 후손이다. 이 가문 역시 다윗 치하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으니, 다윗 시대에는 사독과 아비아달이란 양대 제사장 가문이 존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무엘 하 15장 25절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하나님의 궤를 … 도로 메어 가라
이처럼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렐 성내로 다시 반환시킨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중 우선 표면적인 이유로서, 예루살렘 성내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함이었음을 들 수 있다. 즉 다윗은 효과적인 전투를 위해 연락원(連絡員)이 필요하였는데, 이에 적합한 인물로서 제사장들을 지목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압살롬에게 언약궤를 지키는 자로만 보일 것이므로,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28절). 다음으로 다윗이 이처럼 행동한 내면적인 이유는, 그가 지금의 곤경을 하나님의 징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26절). 즉, 다윗은 자신이 현재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한 언약궤를 모신다 해도 과거의 죄에 대한 징계(12:10-12)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Keil & Delitzsch). 그렇지만 다윗이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의심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예루살렘 성을 떠날 때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확신하였다(14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가 언약궤를 반환한 것은, 비록 하나님의 임재의 가견적(可見的)인 상징물이 곁에 없다 할지라도 자신의 나라를 영원히 지속시켜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7:16)을 믿은 까닭임이 분명하다(The Interpretre’s Bible, Lange). 또한 다윗이 언약궤를 반환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현재 피신 길에 오른 자신과 더불어 정처 없이 유리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Schulz). 즉 다윗은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것을 염려하였기에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되돌려 보낸 것이다.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 보이시리라
이는 다윗 왕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미신적으로 섬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그의 곁에 있는 것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과 함께 함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였다(Lange, The Interpreter’s Bible).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다윗의 신앙 고백이며,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겠다고 하는 순전(純全)한 신앙의 표현이었다(Lange).
사무엘 하 15장 26절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선히 여기시는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본 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뻐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의 처사에 자기 자신을 모두 맡기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복 하겠다고 하는 다윗의 진정한 겸손과 순종의 자세이다(삼상 15:22).
사무엘 하 15장 27절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읍으로 돌아가라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여기서 ‘선견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로에’는 ‘보다, 감찰하다’는 뜻의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말로서 관찰자(觀察者)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윗 왕이 사독을 가리켜 선견자라고 부른 것은 대제사장의 관찰 기능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즉, 당시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임무뿐만 아니라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관찰하여 왕이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는 임무도 수행하고 있었다(삼상 22:10, 23:6). 따라서 본 절은 다윗이 사독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왕인 자신을 위하여 그가 모든 일을 관찰해야 할 임무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은 이로써 사독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의 동태를 살펴 자신에게 나아갈 바를 가르쳐 주도록 일깨우고 있다. 한편 ‘선견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삼상 9:9 주석을 참조하라.
사무엘 하 15장 28절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리라 하니라
광야 나루터
이는 요단 강 나루터로서 사해 입구에서 약 4.5 km 떨어진 지점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여차하면 요단 강을 건너 먼 곳으로 도망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다윗 왕은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보고를 기다렸다(17:16, 21, 22).
사무엘 하 15장 29절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머물러 있으니라
사독과 아비아달이 … 머물러 있으니라
사독과 아비아달이 다윗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음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이제 압살롬의 동정 파악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것이다(27절 주석 참조). 그런데 이와 같은 순종의 자세는 뒤이어 후새에게도 발견된다(32-37절).
사무엘 하 15장 30절
다윗이 감람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각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가니라
감람 산
예루살렘 성읍과 유다 광야 사이에 병풍처럼 서있는 높은 구릉(丘陵)이다. 감람나무(olive tree)가 많아 붙여진 이름인데, 예수께서 승천하신 곳으로 유명하다(행 1:12). 한편 솔로몬은 이방인 아내들을 위하여 이곳에 우상 산당을 지었는데(왕상 11:7, 8) 요시야 때에 훼파되었다(왕하 23:23, 24).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머리를 가린 행위는 깊은 슬픔을 나타낸다. 또한 머리는 그 사람의 명예의 상징이므로,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곧 자신의 명예가 상실된 것을 부끄러워한 행동이기도 하다(에 6:12, 겔 24:17, 렘 2:37). 즉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 야기된 압살롬의 반역(12:10-12)에 대하여 이제 큰 고통과 수치, 슬픔을 맛보고 있다. 13:19 주석 참조. 한편, 이 와중에서 다윗이 맨발로 울며 행했다는 말은 그가 자기의 죄를 깊이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Ewald). 동시에 이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낮아진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Thenius).
사무엘 하 15장 31절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미 앞서 압살롬의 모사(謨士)가 된(12절) 아히도벨을 언급하고 있다. 아마 이는 그에 맞서 싸우게 될 다윗의 모사 후새(32-37절)을 소개하기 위한 것인 듯하다. 즉, 이들의 지략의 대결은 본 사건의 흐름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그 전(前) 단계로 여기서 아히도벨은 언급하고 있다(17:1-23).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다윗이 애통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심정으로 드린 이 기도는 비록 짧지만 하나님께 그대로 상달되었다. 즉, 아히도벨의 모략은 후에 후새에 의하여 완전히 무력화(無力化)되었다(17:14). 여기서 우리는, 마음을 다한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능력이 있음을 보게 된다(막 9:28, 29, 약 5:16-8).
사무엘 하 15장 32절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
이는 감람 산 꼭대기를 가리킨다(30절). 한편 여기서 ‘경배’란 말은 제사보다 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24절 주석 참조). 한편 이곳은 지리적으로 인적이 드문 곳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도 이곳에서 기도하신 적이 있다(마 26:30, 눅 21:37, 22:39).
아렉 사람 후새가 …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후새가 자신의 옷을 찢으며 흙을 머리에 덮어쓴 채 다윗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곧 통일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 길에 나서게 된 것에 대한 자신의 충격과 슬픔을 토로한 것이었다(1:2 주석 참조). 아무튼 다윗이 이처럼 피난길에서나마 후새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간절한 기도(31절)의 응답이었다. 즉, 다윗 왕은 여기서 후새를 만남으로써 아히도벨의 모략을 깨뜨릴 수 있는 결정적인 전기(轉機)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17:1-23). 후새는 다른 곳에서 다윗의 친구로 기록되어 있는데(37절, 16:16, 대상 27:33), ‘친구’에 해당하는 ‘레에’는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왕에게 직고 하는 대신(8:18)을 의미하는 말이다(Hertzberg, Keil). 따라서 후새는 다윗 왕의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 왕의 정책 결정에 상당 부분 관여한 모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렉 사람이란 에브라임 지경의 에렉 성 출신자들을 의미하는데, 이들의 거주지는 벧엘과 아다롯 사이 곧 에브라임 지파의 남쪽 경계지(수 16:2)였다(Lange).
사무엘 하 15장 33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내게 누를 끼치리라
다윗 왕이 후새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아마 후새가 나이가 매우 많아 자신의 일행을 따라오기 힘들 것으로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 가운에는 아히도벨에 버금가는 모사인 후새가 예루살렘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압살롬 측의 정보를 탐지하고, 저들의 계략을 깨뜨리는 것이 휠씬 더 유익하다는 의미 또한 담겨 있을 것이다(34절).
사무엘 하 15장 34절
그러나 네가 만일 성읍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전에는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더니 이제는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다윗이 후새로 하여금 이러한 모략을 꾸미게 한 것은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였다. (1) 아히도벨이 다윗 왕을 추격하는 일에 대하여 압살롬에게 모략을 베푸는 일을 후새가 중간에서 방해하도록 하기 위함이다(17:1-14). (2) 압살롬의 결정 사항을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알려주어 다윗 자신에게 전하게 하기 위함이다(35, 36절, 17:15-23).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자신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는 그분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인간적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된 믿음과 기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 구하고, 구한 다음에는 찾고, 찾은 다음에는 두드리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마 7:7, 8).
사무엘 하 15장 35절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왕의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알리라
35-36절의 개요
이 부분은 다윗의 비상 연락망이 어떻게 짜여졌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곧 후새-사독-아비아달-아히마아스와 요나단-다윗의 순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사무엘 하 15장 36절
그들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그들과 함께 거기 있나니 너희가 듣는 모든 것을 그들 편에 내게 소식을 알릴지니라 하는지라
사무엘 하 15장 37절
다윗의 친구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후새가 곧 성읍으로 들어가고
앞의 대제사장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29절) 후새도 다윗 왕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한다. 사실상 이러한 순종은 압살롬에 의해 그 음모가 발각될 경우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모험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새가 이를 감행한 것은 그만큼 그가 다윗 왕을 존경했음을 의미한다. 아무튼 이와 같이 국내의 종교 지도자들(대제사장들)과 정치 지도자(후새)가 충성스럽게 다윗 왕을 지지했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Payne).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더라
다윗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급히 피신 길에 오른 소식(13-18절)을 들은 압살롬이, 이제 반란지(反亂地)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승리의 입성(入成)을 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7-1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