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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보며 성경 읽기/10 사무엘 하

사무엘 하 3장 27절-39절, 주석 및 해설 정리

사무엘 하 3장 27절부터 39절까지의 말씀은, 독선적인 요압이 독단적으로 아브넬을 살해하고 난 후폭풍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 다윗은 진심 어린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3장 27절부터 39절까지의 말씀을 주석 및 해설을 참조하여 개역개정 성경으로 통독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3장 27절-39절, 주석 및 해설 정리
사무엘 하 3장 27절-39절, 주석 및 해설 정리

 

 

사무엘 하 3장 27절-39절, 주석 및 해설 정리

 

 

사무엘 하 3장 27절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조용히’에 해당하는 원어 ‘바쉐리’는 ‘개인적으로’라는 뜻이다. 즉 이는 요압이 마치 아브넬에게 개인적으로 은밀히 말할 것이 있는 것처럼 꾸며 그를 유도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는 요압이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복수를 하려 했다면 좀 더 당당히 아브넬과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Matthew Henry’s Commentary).

 

성문 안으로 들어가

당시 ‘성문’은 공공 행사를 위항 모임의 장소였을 뿐 아니라 사교의 장(場)이기도 하였다. 창 19:1 주석 참조. 따라서 그곳은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으니 요압이 아브넬을 은밀히 처리하기에는 부적당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혹자는 여기서 가리키는 ‘성문’이란 ‘성문 근처의 한적한 곳’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70인 역(LXX)이 바로 이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공동번역 역시 ‘성문 한 옆’으로 번역하고 있다(Wycliffe).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본 절은 아브넬의 죽음이 요압의 복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전에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것은 수 차례의 경고 후에 어쩔 수 없이 정당 방위로 행한 것이었다(2:21-23). 따라서 이는 피의 복수가 될 수 없다(민 35:22-25). 그런데도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으니 다른 까닭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아브넬이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자 실력자로(6절) 다윗의 신임까지 받고 있었던 터라(20절), 자신의 지위를 아브넬에게 빼앗길까 봐 우려했기 때문이다(Keil & Delitzsch, Lange, Matthew Henry, Wycliffe, Pulpit Commentary). 요압의 이와 같은 악의에 찬 욕망은 다시 아마사를 살해하는 일로 나타난다(20:11).

 

 

사무엘 하 3장 28절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후에 다윗이 듣고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26절)는 말과 대구(對句)를 이루는 구절로, 아브넬의 죽음에 다윗이 전혀 무관함을 시사해 준다(Lange).

 

나와 내 나라는 … 무죄하니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것은 공적(公的)인 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감정과 이기심에 의거한 사적(私的)인 일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책임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돌릴 수 없고 오직 요압에게만 돌아가야 할 뿐이라는 강조적 의미이다.

 

 

사무엘 하 3장 29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그 죄가 … 돌아갈지어다

다윗이 자신의 신복인 요압을 이토록 저주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요압이 저지른 죄 때문이었는데, 그 죄의 내역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1) 요압의 행위는 정당한 복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사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아브넬보다 아사헬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2:21, 22). (2) 아무리 정당한 복수라 할지라도 복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레 19:18, 눅 6:27, 롬 12: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자신의 감정에 따라 복수했다. (3) 요압은 이 일과 관련하여 왕인 다윗과 전혀 의논을 하지 않았다. 이는 곧 국정(國政)의 최고 책임자인 다윗을 무시한 처사로서, 일종의 반역 행위가 아닐 수 없다. (4) 무엇보다도 요압은 다윗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5:1-5, 삼상 16:28, 29)을 얼마 동안 지연시켰다. 즉 그는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만 생각했다. 따라서 이상과 같은 죄의 내역으로 보아 다윗이 자신의 신하 요압을 저주한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니라 아주 공의로운 처사였음을 알 수 있다.

 

백탁 병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조브’는 ‘흐르다, 유출하다’는 뜻의 ‘주브’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는 레위기 15장에 기록된 유출병을 의미하는 듯한데, 그 증세는 임질(淋疾)과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병 환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라’는 비단 나병뿐 아니라 각종 피부병에 걸린 자까지 의미하는 단어이다.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

‘목발을 의지하는 자’ 또는 ‘막대기를 짚는 자’(NIV) 란 뜻이다. 이에는 절름발이나 소경이 해당된다(Lange).

 

 

사무엘 하 3장 30절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 죽인 것은

아브넬 살해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아비새도 관계했음을 보여준다. 추측컨데 요압은 사전에 아비새와 공모하여 아브넬을 유인, 살해하였을지도 모른다(Pulpit Commentary).

 

 

사무엘 하 3장 31절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다윗이 요압 … 백성에게 이르되

이처럼 다윗이 아브넬을 죽인 요압도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애통하게 한 것은, 아마 그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를 반성토록 하기 위함에서였을 것이다(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그런데도 이후 요압이 이번 경우와 유사하게 아마사마저 살해한 것으로 보아(20:9, 10), 요압이 자신의 죄악을 전혀 회개치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히브리인들이 극한 슬픔을 표출하던 전형적 방법이다. 1:2 주석 참조.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여기서 다윗이 특별히 ‘왕’으로 언급되고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즉 다윗이 왕의 신분으로서 마치 자신이 상주(喪主)인 양 아브넬의 장례식을 주도하며 상여 뒤를 따라간 것은 곧 아브넬의 장례식이 국장(國葬)으로 치러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아브넬의 장례식에 특별히 신경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곧 백성들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아브넬의 죽음은 다윗이 요압과 짜고 행한 것으로 오해받기 충분하였다. 때문에 다윗을 불신한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시 이스보셋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함을 백성들에게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37절).

 

 

사무엘 하 3장 32절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히브리인들에게 애곡(哀哭)은 장례식의 첫째 요건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자연스러운 슬픔의 발로이자 죽은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주나 친족뿐 아니라 모든 문상객들 역시 빈드시 애곡을 하여야 했다. 본문에서 아브넬의 장례식에 참석한 다윗과 모든 백성이 애곡 한 것도 이와 같은 풍습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러한 풍습은 훗날 소위 직업적인 호상인(護喪人), 즉 ‘애곡 하는 여인들’을 생기게 하였다(대하 35:25, 전 12:5, 렘 9:17, 암 5:16, 마 9:23).

 

 

사무엘 하 3장 33절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애가를 지어 이르되

여기서 ‘애가’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 즉 ‘키나’를 가리킨다. 1:17 주석 참조.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이스라엘의 총사령관이자 실권자인 아브넬이 요압에게 살해된 것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크나큰 과오라는 뜻이다. 즉, 블레셋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생존한 그가 요압의 얕은꾀 하나 짐작하지 못하고 죽은 사실에 대해 다윗은 놀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놀라움 때문에 다윗은 아브넬을 ‘미련한 자’에다 비유한 것이다. 한편 공동번역은 본 절을 보다 의역(意譯)하여 ‘어이없이 개죽음을 당하다니’로 번역하고 있다.

 

 

사무엘 하 3장 34절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네 손이 …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본 절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다르다. 그중 하나는 이 말이,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할 당시 아브넬은 요압의 공격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자유스러운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Lange). 두 번째 견해는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행위(2:23)로 인하여서는 결코 포박당하거나 투옥되지 아니하였음을 뜻한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이 중 그 어느 견해를 취하여도 전체 문맥에는 별 지장이 없다. 다만 이는 아브넬이 의외의 죽음을 당하였음을 강조하는 데 그 의의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원문에서 ‘불의한 자식’은 복수형인 ‘불의한 자식들’로 되어 있다. 한편 여기에서 ‘불의한 자식들’은 강포, 폭행을 일삼는 자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절은 아브넬이 그와 같은 무리들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죽은 것처럼 비참하게 살해당했다는 뜻이다.

 

 

사무엘 하 3장 35절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이 말은 백성들 각자가 다윗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을 가져왔다는 말이 아니다. 대신 이는 그 당시의 풍습을 보여 주는 말로써, 장례식 이후에 참석자들을 위해 마련한 음식(렘 16:7, 겔 24:17, 22, 호 9:4)을 백성들이 다윗에게 권했다는 뜻이다(Lange, Pulpit Commentary).

 

내가 …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 마땅하니라

다윗이 이처럼 금식(禁食)을 단행한 것은 애도를 표하기 위함이었다. 즉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애도하여 저녁때까지 금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1:12), 아브넬을 위해서도 금식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사무엘 하 3장 36절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아브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다윗의 행동을 본 백성들이, 그제야 다윗이 요압과 결탁하여 아브넬을 죽였을 것이라는 의혹을 푼 것을 뜻한다(37절). 그리하여 다시 백성들이 다윗을 신뢰하며 호의(好意)를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다윗의 진실된 행동은 오히려 위기를 극복하고 온 백성들의 마음을 차지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진리(롬 8:26) 또한 확인할 수 있다.

 

 

사무엘 하 3장 37절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이 날에야 … 아니라

‘이 날에야’라는 말은 이전에는 백성들이 아브넬을 살해한 범인으로 다윗을 의심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

이 말은 지금까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까지도 다윗을 의심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이제 다윗 왕을 믿게 된 것은, 다윗의 논리적인 말이나 권모술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의 진실된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36절 주석 참조).

 

 

사무엘 하 3장 38절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

여기서 ‘지도자’에 해당하는 ‘사르’는 간혹 ‘왕’을 뜻하기도 하지만(시 45:16, 사 9:6, 단 8:25), 대개는 군대 장관(단 10:13)이나 한 성읍의 최고 지배자(10:3, 삿 8:6, 에 3:12)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큰 인물’에 해당하는 ‘가돌’은 ‘위대한 자’란 뜻이다. 그런데 공동번역은 이 두 단어를 합하여 ‘위대한 장군’으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다윗이 아브넬을 이렇게 칭한 까닭은 그가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스보셋의 군장(軍長)이었을 뿐 아니라, 통일 이스라엘 왕국 건설에 조력하였던 자였기 때문일 것이다(Lange).

 

 

사무엘 하 3장 39절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 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내가 … 약하여서

이는 아마 다윗이 아직 유다 한 지파의 왕으로써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상태일 뿐 아니라(2:1-4), 적대 세력인 이스보셋 정권도 존속하고 있음(2:8-10)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여호와는 … 그 악한대로 갚으실지로다

이처럼 다윗이 아브넬 살해 사건에 대해 보고를 받자마자(28절) 즉시 요압을 처벌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 심판을 맡긴 까닭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군장으로서 요압이 지니고 있던 강력한 세력 때문, (2) 그를 처벌할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유다 지파의 내분 때문, (3) 온 이스라엘의 통일에 있어서 요압과 같은 용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상의 이유들 때문에 다윗이 처벌을 일시 유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압을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죽기 전 솔로몬에게 유언하기를, 끝내 회개치 않고 왕국에 대한 반역 행위를 계속 저질렀던 요압을 처형토록 지시하였기 때문이다(왕상 2: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