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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보며 성경 읽기/10 사무엘 하

사무엘 하 6장 1절-11절, 주석 및 해설 정리

사무엘 하 6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옮겨 오다가 생긴 사건의 내용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치적이고 종교적 중심지로 세우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고 새 수레에 궤를 옮겨오다가 웃사가 죽임을 당합니다. 본문을 주석과 해설을 참조하여 개역개정 성경으로 통독하였습니다.

 

사무엘 하 6장 1절-11절, 주석 및 해설 정리
사무엘 하 6장 1절-11절, 주석 및 해설 정리

 

 

사무엘 하 6장 1절-11절, 주석 및 해설 정리

 

 

사무엘 하 6장 1절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뽑은 무리 삼만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3:1-5에 의하면 ‘뽑은 무리 삼만’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골고루 뽑은 자들일 것이다(Keil).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올려 오기 위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의 온 이스라엘’(대상 13:5)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곧 이스라엘 전체에서 골고루 뽑은 수행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뽑은 무리 삼만’은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다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일종의 군사들이었을 것이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왜냐하면 당시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던 바알레유다(2절)는 블레셋 지경(地境)에서 가까웠으므로 그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작은 법궤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서 삼만이란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 혹자의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The Interpreter’s Bible). 이와 관련 70인 역(LXX)은 본 절의 3만이란 수를 7만으로 기록하고 있음도 기억하라. 한편,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골고루 수행자들을 뽑은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였을 것이다. (1) 법궤에 대한 온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켜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2) 각 지파 간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모으고

이 말은 이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총회는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 명이나 모였던 총회(5:1-3, 대상 12:23-40)에 이은 제2차 총회임을 보여 준다.

 

 

사무엘 하 6장 2절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바알레유다

혹자는 ‘바알레유다’(Baale of Judah)를 ‘유다의 방백들, 유다 백성들’로 해석하였다(LXX, Vulgate, Luther, J. W. Wevers). 그러나 이 해석은 구문법상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한 문장 안에 지명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거기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거기서’가 지시하는 지명을 의미하며, 혹자들이 해석한 대로 일반명사는 아니다. 한편, 바알레유다는 ‘숲의 성읍’이란 뜻의 기럇여아림의 옛 명칭이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으며 ‘바알라’로 불렸다(수 15:9, 대상 13:5, 6).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다의 바알라’(Baalah of Judah),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 서쪽 15 km 지점에 위치했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 궤는 이제 다윗에 의하여 온 이스라엘의 관심이 집중되기 전까지 이곳에 70년 이상(B.C. 1075년~B.C. 1003년, 이 기간은 아벡 전투 때부터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 때까지의 기간이다, Leon Wood) 머물러 있었다(삼상 7:1, 2).

 

그 궤는 …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구를 직역하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그 위에서 불려지는 하나님의 언약궤’이다. 여기에서 해석상 중요한 낱말은 ‘그 위에서’(히, 아세요)이다(개역개정 성경에는 ‘사이에’로 번역되었음). 과연 ‘그 위에서’는 어디를 의미하는 걸까? (1) 혹자는 ‘그 위에서’를 ‘그룹 위에서’로 해석한다(Clericus). 이 경우 본 절은 ‘그룹 위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 … ’가 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룹 사이에’ 계시기 때문이다(삼상 4:4). (2) 또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서’를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 위’로 해석한다(Keil, Lange, The Interpreter, s Bible). 이렇게 볼 때, 본 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바로 그 위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불린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啓示)이며 그의 능력과 속성에 대한 표현이며, 그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본 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그분의 능력, 그분의 성품, 그분의 영광이 임재하여 있다는 말이 된다. 즉, 하나님의 언약궤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가시적 보좌(寶座)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궤를 ‘주의 권능의 궤’라고 한 표현과 일치한다(시 132:8). 따라서 이 해석은 비교적 타당성을 가진 것 같다. 한편, 다윗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가시적 보좌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려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정 왕국(神政王國)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Ce Graaf).

 

그룹들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의 무리이다. 이들의 전체 수효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들의 직무에 대해서는 성경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즉 이들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쫓겨난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를 지켰으며(창 3:22-24) 하나님의 보좌 병거를 끄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겔 1:20). 그러나 이들의 형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다만 성경 곳곳의 기록들(겔 1, 10장, 계 4:6-8)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은 날개를 가졌으며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출 25:18, 19 주석 참조.

 

만군의 여호와

5:10 주석 참조.

 

 

사무엘 하 6장 3절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헌 수레가 아닌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존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분명히 법궤 운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민 4:15, 7:9). 그런데도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래(삼상 25:1) 다윗의 통일 왕국이 성립되기까지의 혼란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여 다윗도 율법에 정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Pulpit Commentary). (2) 당시 블레셋족이나 페니키아 인들은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다윗이 이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Lange). 아무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은 있었으나 그 방법 면에서 그릇됨을 볼 수 있다.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장)가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기까지 안치되어 있던 기럇 여아림 사람 아비나답의 집을 가리킨다(삼상 7:1, 2).

 

아비나답의 아들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는 복수형으로 ‘아들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복수 형태 ‘아들들’은 때로 ‘손자’(grandson)를 의미하기도 한다(민 16:1, 왕하 25:22, 대상 8:40, 에 2:5, 스 7:1). 이렇게 볼 때 본 절의 ‘아비나답의 아들’은 아비나답의 손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이미 70년 전부터 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삼상 7:1, 2). 그러므로 이제는 엘르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들인 웃사와 아효가 이 일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Keil & Delitzsch, Lange, Pulpit Commentary).

 

아효

이 말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이 말은 ‘그의 형제들’로 번역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법궤는 웃사와 그의 형제들이 운반한 것이 된다. (2) 사람의 이름으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1) 번의 경우처럼 ‘그의 형제들’로 해석하면, 본서 저자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웃사의 형제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되니 이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따라서 (2) 번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사무엘 하 6장 4절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사무엘 하 6장 5절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이스라엘 온 족속

이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뽑힌 자들을 의미한다. 1절 주석 참조.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 … 연주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큰 역사들과 관련하여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다(수 6:4-20, 왕상 1:39, 대하 5:11-14).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며 음악을 연주한 사실은 그들이 이 행사를 지극히 거룩한 의식으로 여겼음을 증거 한다. 한편, 여기서 ‘연주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하크’는 본래 ‘뛰놀다, 즐거워하다’는 의미이다(삼상 18:7, 대상 15:29, 잠 8:30, 31, 렘 30:19).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잔치 분위기에 젖어 기뻐하면서 연주한 것을 의미한다(Lange, Keil). 본 절의 평행 구절인 대상 13:8에는 ‘뛰놀며 노래하며 … 연주하니라’라고 되어 있다.

 

수금

히브리어로는 ‘킨노르’라고 하는데 6줄로 이루어진 현악기이다. 대개 노래를 부를 때 반주를 넣는 악기로 사용되었다.

 

비파

하프의 일종이다. 역사서(삼상 10:5, 왕상 10:12, 대하 9:11)와 시편(시 33:2, 57:8, 92:1-3)등에 자주 언급되는 악기로 그 용도는 수금과 같다.

 

양금

히브리어로 ‘므나아느임’이라고 하는 이 악기는 탬버린의 일종이다.

 

제금

히브리어로 ‘첼츨림’ 또는 ‘므칠타임’(대상 13:8, 대하 5:12)이라고도 하는 이 악기는 심벌즈의 일종이다.

 

여호와 앞에서

그 당시 언약궤 앞에 있다는 것은 곧 여호와 앞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민 10:35, 수 6:8).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출 37:1-5 주석 참조.

 

 

사무엘 하 6장 6절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나곤의 타작마당

이에 대해 대상 13:9에서는 ‘기돈의 타작마당’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이 두 기록의 차이를 원문 파손으로 인한 두 저자의 실수로 보는 견해이다(The Interpreter’s Bible). (2) ‘기돈’을 타작 마당의 주인 이름으로 보고 ‘나곤’을 타작 마당의 수식어로 보는 해석이다. 즉, 나곤이란 말의 의미는 ‘예비된’이란 뜻으로 나곤의 타작 마당은 곧 ‘기돈의 예비된 타작 마당’이라는 해석이다. 이 해석은 나곤을 ‘쿤’(예비된, 준비된)의 파생어로 본 데서 나온 견해이다. (3) ‘나곤’을 ‘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수식어로 봄은 물론 ‘기돈’ 역시 타작 마당을 수식하는 말로 보는 견해이다. 즉, ‘기돈’은 ‘파괴, 재앙’이란 뜻을 지닌 단어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예비되었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재앙이 웃사에게 내린(7절) ‘재앙의 타작 마당’이었다고 해석한다(Lange). (4) 세 번째 견해와 같이 ‘기돈’을 사람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재앙’으로 해석하긴 하나 ‘나곤’을 ‘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말로 보지 않고 ‘나카’(치다)의 분사로서 ‘충돌하는’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Keil). 따라서 이 견해는 이 타작 마당을 ‘충돌의 타작 마당이며 재앙의 타작 마당’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네 견해 중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중 (3) 번이나 (4) 번을 지지하는 것이 비교적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 (1) 번은 해설이 너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 번은 본문의 문맥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3) 번과 (4) 번은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여(8절) 웃사에게 재앙이 임했다고 한 본문과 잘 어울린다. 이상의 견해들에도 불구하고 ‘기돈’이 ‘나곤’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 역시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소들이 뛰므로

‘뛴다’는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트’는 본래 ‘미끄러지다, 걸려 넘어질 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소들이 돌부리에 걸리거나 미끄러져 비틀거리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Keil & Delitzsch, Pulpit Commentary). 그런데 이러한 소들의 실수는 앞서 블레셋 백성들이 암소 두 마리에 법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운반했을 때에는 없었던 불길한 흉조였다(삼상 6:12). 그러므로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 블레셋 인들도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긴 하였다. 그러나 블레셋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행위는 묵인될 수 있었다(삼상 6:10-16).

 

 

사무엘 하 6장 7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웃사가 잘못함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것을 가리킨다(6절). 그런데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 했던 웃사의 행위는 인간적으로 또는 상황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하나님 말씀에 의거할 때 엄연한 신성모독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법궤의 신적 특성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 중 심지어 고핫 자손일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다(민 4:15).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로써 거룩한 것이니 아무도 들여다보지도 말라고 명하셨으며(민 4:20, 삼상 6:19),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민 4:15) 채(pole)를 궤의 고리에 꿰어(출 25:14) 운반하라고 명령하셨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매우 엄하게 법궤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웃사가 그것을 만진 것은 그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겼으며, 하나님을 가볍게 여겼다는 증거였다.

 

그곳에서 치시니 … 죽으니라

이처럼 구약 시대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자를 향하여 즉각적인 진노를 발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진노가 유보된 것이다(롬 5:8, 9). 그러니 이 같은 축복을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엡 2:8).

 

 

사무엘 하 6장 8절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여기서 ‘치시므로’로 번역된 ‘페레츠’의 원동사 ‘파라츠’는 ‘무너지다, 파괴하다, 분산시키다’ 등의 뜻이 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사 그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하신 것(7절)을 가리킨다.

 

다윗이 분하여

‘분하여’에 해당되는 원어 ‘하라’는 단순히 괘씸한 마음을 품거나 섭섭한 감정을 지니는 것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의 기본 뜻은 ‘타오르다, 심히 뜨거워지다, 빨갛게 되다’로서 온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 극도의 분노를 가리킨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아니면 무엇에 대하여 이처럼 분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두 견해가 있다. (1) 다윗은 웃사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Lange, Matthew Henry, Pulpit Commentary). 즉 다윗이나 그의 백성들 그리고 웃사는 무슨 큰 불경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경솔한 행동을 한 것뿐인데 하나님께서 그처럼 준엄한 형벌을 가하시니(7절) 이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는 지금껏 하나님을 대해온 다윗의 신실한 태도(2:1, 5:12, 23)에 비추어 볼 때 수긍하기 어렵다. (2) 다윗은 자신과 웃사의 불찰로 인하여 빚어진 비극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화를 내었다는 견해이다(Keil & Delitzsch).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계획이 자신과 웃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중단되게 되었음을 크게 통탄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견해는 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구절(9절)에 의거할 때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다윗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분을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여기서 ‘베레스’로 번역된 ‘페레츠’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곧 ‘갑작스러운 공격, 뜻하지 아니한 재난’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사항에 대한 ‘위반, 범법’이다. 따라서 ‘베레스 웃사’란 말은 ‘웃사를 치심’ 또는 ‘웃사의 위반’이란 뜻이다.

 

 

사무엘 하 6장 9절

 

다윗이 그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아직 미처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자신들이 율법에 명한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치 아니한 데 있음을 깨닫지 못한 다윗(3, 4절 주석 참조)은 우선 법궤로 인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재앙이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시는 역사를 중단한 채 황급히 법궤를 변방으로 이송시켰다(10절).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또 하나의 경솔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법궤를 맡아 관리하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11절).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를 접하였을 때 무조건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원인을 규명한 후 올바른 방법에 따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어야 마땅했다(Matthew Henry).

 

 

사무엘 하 6장 10절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다윗 성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성’에 새로이 붙인 이름이다. 5:7 주석 참조.

 

가드 사람 오벧에돔

대상 26:1-4에 의하면, 오벧에돔은 고핫의 자손이며 후에 예루살렘 성문의 문지기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런데 본 절에서 그를 가리켜 가드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가 단 지파 지경 내에 있는 레위인의 성읍 가드 림몬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Keil, Clericus, Wycliffe, Pulpit Commentary).

 

 

사무엘 하 6장 11절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아마도 이 말은 그의 가족, 가축, 밭의 소산 등이 풍성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제 하나님의 진노(7절)가 깨끗이 풀린 줄 깨달았음이 분명하다(Hertzberg, Matthew Henry).